이 정재와 연애하면 생기는 일
왜 이런 답답한 남자와 살고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꼼꼼함에 감동받아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를 한 시간이나 달린 후에야,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선물 교환의 흔한 이야기로 시작한 이 사건은 결국 우리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하루로 기억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왜냐고? 남자친구가 자동차를 돌려 고속도로 휴게소 쓰레기통을 몽땅 뒤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33살 밸런타인데이, 내 인생 처음 초콜릿을 건네줄 남자가 나타났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와 두 달째 데이트 중에 찾아온 밸런타인데이, 연애 무지렁이였던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 선물을 줄 수 있다니 왕 설렌다. 어떤 선물을 줄까 즐거운 고민에 빠져본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마음에 드는 수제 초콜릿 선물상자를 골랐다. 그런데 디자인과 포장은 똑같은데 초콜릿 개수에 따라 중자 크기는 2만 9천 원, 대자 크기는 4만 9천 원 두 개의 상품 중 무엇을 살까 선택장애가 왔다. 돈을 허투루 쓰기 싫은 나는 아무래도 싼 거를 고를까 싶은데 조금 부실해 보일까 싶어 망설이고 있었다. 근데 여동생이 '선물은 비싼 걸 하는 게 정석이야' 옆에서 조언을 해준다. 그래 맞아. 남자친구 사무실로 초콜릿 선물을 보낼 거니까 큰 것을 보내는 거 좋겠어. 내 사랑의 선물이 맘에 들길 바라며, 그의 이름과 회사 주소를 주문서에 입력했다.
드디어 밸런타인데이 당일, 남친에게 내 선물에 대한 소감을 물어보고 싶어 안달이다. 나는 퇴근하여 그의 자동차에 조수석에 앉아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표정을 보니 싱글벙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역시 초콜릿 선물 작전은 성공이야.
"내가 보낸 초콜릿 선물은 잘 받았어? 초콜릿 맛은 어때?"
그는 뒷좌석에 있던 커다란 초콜릿 선물 상자를 꺼내서 나에게 보여줬다. 인터넷 쇼핑센터 광고 이미지와 똑같이 생긴 박스 포장지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역시 나의 선택은 옳았어. 여자친구 먹으라고 몇 개 초콜릿을 챙겨 왔겠지 기대를 했는데, 상자 안에는 남은 초콜릿은 하나도 없고, 그저 초콜릿을 감싸던 흰색 종이 포장지들만 수북이 쌓여있었다.
"수제라 그런가 맛은 있었어. 근데 나도 2개밖에 먹지 못했어."
"왜? 초콜릿이 30개도 넘게 있었는데."
그는 오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콜릿 택배 상자는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배달 온 모든 소포나 우편물은 문서수발실에서 팀별로 배분한다. 사무실 같은 팀 직원은 문서수발실에 우편물을 찾으러 갔다가 그에게 온 택배 박스를 같이 들고 왔다. '상자 사이즈도 그렇고, 보낸 사람 이름도 낯선 여자 이름이고 이거 딱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냄새가 확 나는 거 같은데. 그렇게 여자에 관심이 없다더니 여자친구를 사귄 거였어?' 박스 안이 너무 궁금하다. 얼른 확인해야 한다.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팀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친다.
"무벽씨한테 택배 왔는데 아마 지금 사귀는 여친한테서 초콜릿 선물을 받은 거 같아요."
팀원들은 테이블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그 위에 비밀에 가린 택배 상자가 올려졌다.
"내가 상자 열어봐도 괜찮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빠른 손놀림으로 선물 박스는 이미 개봉되었다.
짜잔, 초콜릿 선물상자 뚜껑이 열렸다. 우르르 모인 팀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그 안에는 32개의 한 입 크기 수제 초콜릿이 하얀색 포장지에 하나씩 정성스럽게 싸여있었다. 남자들만 있는 사무실에 이런 이쁜 초콜릿 상자라니 사람들은 우와 탄성을 지른다.
"오호, 여자친구가 좀 신경을 썼는데. 이런 좋은 선물은 같이 나눠먹는 거 알지?"
그리고 한입 크기의 수제 초콜릿을 손에 쥐고서 입속으로 쏙 집어넣는다.
"크기가 작아서 한 개로는 맛을 잘 모르겠네. 다른 모양도 먹어봐야지."
그렇게 직원들 입속으로 초콜릿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는 그 장면들을 얼떨결에 지켜봤다. 초콜릿을 먹지 않아도 마음은 달달하다. 뭔가 다른 사람들 앞에 면이 설 수 있는 선물을 받아서 기분이 좋다.
남자친구가 내 목에 하트 금목걸이를 걸어준다. 우리 사랑이 무럭무럭 익어갈 때 화이트데이를 맞이했다. 차 안에서 허전한 내 목을 만지더니 상자에서 금목걸이를 꺼내 보여준다. 번쩍번쩍 황금빛 14K 체인 목걸이.
체인 가운데에는 하트 모양의 펜던트 달려있다. 그 하트에는 반짝반짝 큐빅이 알알이 박혀있다. 초콜릿 상자를 주인보다 먼저 빼앗아 가버린 그 동료에게 화이트데이 여친 선물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금목걸이를 추천해 줬다고. 평소에 액세서리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 흔한 목걸이 하나 없었는데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이렇게 선물로 주다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그 목걸이는 그와 나의 사랑을 지키는 증표가 되었다. 내 목 주변에 항상 그의 사랑이 매달려있다.
그런데 그 목걸이가 사라졌다. 나의 사랑의 증표를 잃어버렸다. 우리 관계에 위험신호 경계경보가 요란하게 울린다. 누이를 소개해 준다고 전주로 놀러 갔던 날 그날 사건이 터졌다. 전주 한정식 집에서 누이 둘, 꼬마 조카 둘 이렇게 모였다. 큰 밥상에는 잡채, 떡갈비, 갈비찜, 생선조림, 조기구이, 육회, 각종 반찬들이 그득그득 차려져 있었다.
"역시 전주 음식이 최고야. 너무 맛있다. 자기가 전주 출신이라 이런 맛난 음식도 먹고 따봉이야!"
감탄을 하면서 먹고 배가 불러도 계속 먹었다. 마지막에는 전주비빔밥으로 마무리했다. 음식을 다 먹고 배를 두들기면서 남편과 누이는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장난기 많은 2살 조카 녀석은 정신연령 어린 나랑 쿵짝이 잘 맞아서 신나게 티카티카 놀고 있다.
"이거 뭐야?"
조카는 내 목에 걸린 반짝반짝 금붙이 목걸이가 신기했나 보다.
"음, 삼촌이 선물해 준 목걸이야."
그 순간 하트 목걸이는 조카의 작은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좀 더 가까이에서 그것을 보고 싶었던 조카는 자기 몸 쪽으로 확 잡아당겨버렸다. 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목걸이가 내 목에서 끊어져 빠져 버렸다. 조카의 주먹 쥔 손을 펼쳐보니 초롱초롱 큐빅이 박힌 하트 펜던트 고리가 빠져버렸다. 게다가 목걸이 체인 연결고리까지 부서진 것이다. 다들 놀랐다. 남친은 남친대로, 누이는 누이대로, 나는 나대로 깜짝 놀랐다.
"어머 너무 미안해."
누이가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를 한다.
"아니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고치면 되는걸요."
별일 아니다. 아이들이랑 장난치다 보면 이런 일은 언제든 생길 수 있는 거니까 괜찮다.
"그래, 내가 고쳐줄게. 걱정하지 마."
누이는 임시방편으로 식탁에 있던 냅킨으로 부서진 목걸이 조각들을 모아 고이 접어서 조심히 바지 주머니 안 깊숙이 넣었다.
앗, 근데 누이 주머니 안에 있어야 할 나의 목걸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자동차를 타고 경기도로 올라오는 중에 잃어버렸다. 전주에서 즐거운 식사를 뒤로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경상도에 사는 작은 누이는 벌써 출발했다. 내 목걸이를 분해시킨 조카와 큰누이는 안산에 살고 있었다. 안산은 우리가 사는 안양이랑 가까우니 같이 차를 타고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길이다.
"생각해 보니까 네가 목걸이 구입한 데서 고치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남친 큰누나 생각은 어차피 목걸이를 고칠 거면 아는데 가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며 운을 띄운다. 고치는 비용은 자기가 줄 테니 그리 하라고 한다.
"그래 알았어. 내가 금은방에 가서 고칠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남친은 대답을 했다.
지금도 잊지 못할 장소, 우리는 서산 휴게소에 도착했다. 남친은 장시간 운전을 했더니 피곤하다. 바람도 쐬면서 커피라도 한 잔 하고 화장실도 좀 다녀오자며 휴게소로 진입했다. 화장실 볼일도 보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는 남친 옆에서 나는 기지개를 켜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마침 남친은 커피를 다 마셨고 빈 종이컵이 손에 들려있었다. 남친 큰누나는 가볍게 휴게소를 한 바퀴 돌고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야, 이거."
이 말을 하면서 엄지손가락 크기만 한 돌돌 말린 하얀 휴지 조각을 남친에게 건넨다. 안 그래도 종이컵을 버리려는 찰나 휴지를 버릴 때 같이 버려달라고 말하는 걸로 착각하고, 그저 그 휴지를 빈 종이컵에 집어넣고 손으로 컵을 살짝 구긴 다음, 바로 옆에 있는 휴게소 공용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피로를 풀었던 휴게소에서 엄청난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휴게소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진입해서 한 35분 정도 상행선을 타고 있었다. 행담도 휴게소가 전방에 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대로 가면 목적지 안산까지 한 시간 안에 도착이다.
"아까 내가 준 목걸이 잘 챙겼지?"
남친 누나가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뭔 소리인지 전혀 알아들을 길 없는 남친은 뜨악이다.
"아니 뭔 소리야? 목걸이는 누나가 가지고 있잖아."
"아까 휴게소에서 목걸이를 싼 휴지를 줬잖아. 기억 안 나?"
순간 휴게소 커피 자판기 앞에서 종이컵을 들고 있었던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아차차, 그러고 보니 누나가 휴지를 주긴 줬는데...
"아니 누나가 휴지를 주니까, 난 휴지를 버려달라고 그러는 줄 알고 휴지통에 버렸지. 근데 그게 목걸이를 싼 냅킨이었다고? 아니 뭐라고 설명을 하고 줘야지? 그냥 휴지를 주면서 이거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흥분을 잘하지 않는 그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내 사랑은 저 멀리 서산 휴게소 휴지통에 매장되었구나. 넋 놓고 남매의 티격태격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속으로 한숨이 난다. 남친이 선물로 준 목걸이는 이미 내 손을 벗어나 휴지 무덤으로 사라졌구나.
'남친과 인연은 이제 여기까지인가?'
마음이 착잡하다.
"수니야 실망하지 마, 내가 똑같은 걸로 사줄게."
"뭐 어쩔 수 없잖아. 괜찮아."
"그 목걸이 없어져도 괜찮겠어?"
"난 괜찮아."
3분 동안 서로 침묵이 이어졌다.
남친은 남친대로 생각에 빠졌고 나는 나대로 생각에 빠졌다.
'너와의 인연은 이제 여기서 끝이거든'
'우리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목걸이가 사라진 것은 이별의 징조야!'
'그 목걸이는 나를 사랑한다고 내 목에 걸어준 화이트데이 선물이었잖아.'
'어떻게 그걸 잃어버릴 수가 있지?'
속으로 남친과 이젠 여기서 바이바이라고 정리했다.
"아니야, 지금 그 휴게소로 돌아가면 찾을 수 있어. 일단 한번 가보자."
"안 찾아도 괜찮아. 휴게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갈 테고, 휴지통에 버리는 휴지 양도 엄청날 텐데."
"음, 아니야 그래도 뭔가 해봐야지."
"가봤자 못 찾을 거야. 그냥 올라가."
"뭐 지금 급한 일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모르니까 일단 가서 확인해 보자."
"괜한 헛수고일 텐데..."
내 마음속에는 이미 그와의 이별을 기정사실로 생각하니 굳이 휴게소를 갈 필요가 있나 싶다.
어차피 못 찾을 건데.
그래도 자동차는 서산휴게소를 향했다. 다시 전주 방향 하행선을 타고 그 문제의 휴게소에 도착했다. 아까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종이컵을 버린 그 장소에 다시 왔다. 분명 자판기 커피를 마셨던 그 장소이다. 그곳에 휴지통을 뒤져보니, 아뿔싸 휴지통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거 아닌가? 기존 쓰레기봉투는 사라지고 새로운 비닐봉지로 교체되었다. 휴게소 안에는 총 8개의 휴지통이 있었다. 그가 일일이 전부 체크해 봤지만 모두 비어진 상태였다. 역시 내 예상대로 찾지 못했다. 이제 진짜 너랑은 끝이구나. 이렇게 확인사살 하는구나.
그런데 남친은 조끼를 입은 청소부 아저씨를 발견했다. 여기저기 막 헐레벌떡 뛰어다니며 뭐라도 대책을 강구하려는 그의 레이더망에 걸린 것이다. 청소부에게 다가가 여기 쓰레기통에 여친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사정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아직 쓰레기 차가 안 실어갔으니, 여기로 와서 한번 봐요."
아저씨는 휴게소 건물 뒤편 공터로 남친을 안내한다. 나는 어차피 기대감이 1도 없어서, 그냥 휴게소 뒤편 먼 산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수니야 찾았어. 찾았어. 목걸이 찾았다고!"
몇 분 후 그는 환한 얼굴빛으로 나에게 뛰어오면서 소리치는 거 아닌가.
"정말? 정말이야?"
그의 손에는 나의 부서진 목걸이가 안겨있었다.
와, 믿어지지가 않는다.
눈앞에서 내 목걸이를 확인했는데도 믿기지가 않는다.
남친은 가늘고 긴 나무 작대기를 하나 주워와서 쓰레기 더미를 하나씩 다 뒤지기 시작했다. 청소부 아저씨는 여덟 개의 쓰레기봉투를 일일이 열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하얀색 종이컵을 집중 공략했다.
'분명히 종이컵 속에 누나가 건네준 목걸이가 휴지와 함께 있을 거야, 내 기억을 믿어.'
여섯 번째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이제 일곱 번째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중이다. 그런데 순간 종이컵이 하나 보였다. 그 안을 열어보니 엄지만 한 하얀 휴지 더미가 나왔다. 그것을 나무 막대기로 찔러 들어보니 여타 휴지와는 달리 무게감이 있다. 딱, 촉이 왔다. 이거다 싶다. 그 휴지를 손으로 가져와서 얇은 종이를 펴보니, 정말 예상한 그대로, 잃어버렸던 바로 그 목걸이가 들어있는 거 아닌가?
수니와의 인연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남친은 서로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물건인 목걸이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차를 돌려 휴게소로 가면서도, 휴게소 휴지통을 찾았을 때도, 뒤 공터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질 때까지도 단 한 번도 못 찾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꼭 찾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념에 가까운 꼼꼼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만약 그가 '똑같은 걸로 나중에 사주면 되지' 이렇게 생각했다면 우리의 인연은 아마 거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남친은 신경 써주신 청소부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담배 한 보루를 구입해서 감사 인사를 드렸다.
이 지점에서 난 뭉클했다. 나는 목걸이를 찾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 했는데, 그가 나를 얼마나 아끼길래, 이토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가. 약간은 가볍게 그에게 다가간 면도 있었는데 그는 아니었다.
그는 묵직한 진심으로 나를 대했다. 끝까지 나를 지켜줄 그런 사람인 것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그 작은 물건 목걸이,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둘만의 소중한 인연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끝까지 추적한 것이다.
이렇게 든든한 남자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이렇게까지 아껴주는 남자를 만나다니 나는 남자복 있는 여자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현명한 판단을 했고 또 집요하게 노력했다. 우리 사랑의 단단함을 확인받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우리 사랑의 뿌리는 더 깊게 땅속으로 뻗었다.
사주에 정재 있는 사람들은 내 것을 아끼고 소중하게 다루고 책임진다. 그래서 그런가 남편은 물건들을 거의 잘 잃어버리지 않는다. 설사 잃어버려도 신기하게도 금방 잘 찾아낸다. 편재인 내 경우는 잃어버리면 되찾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래서 정재 있는 남자가 결혼하면, 아내를 아끼고 소중하게 다루고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본다. 한마디로 가정적인 남자이다. 이런 남자는 여자 입장에서 최고의 남편감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재 남자는 사귈 때에는 그렇게까지 여자에게 잘해주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을 하는 순간부터 더 잘해주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연애할 때는 내 것이 아니지만 결혼하면 내 것이 되었다고 소유욕을 느끼기 때문이다.
남편 사주에 있는 정재, 이 정재 때문에 내가 결혼한 셈이다. 가성비 따지는 편재는 이런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을 것 같다. 가능성이 50% 이상은 넘어가야 움직일 거 같은데. 하지만 정재는 단 1%의 확신만 있어도 끝까지 파고들어 가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걸 꼼꼼함이라 할 수도 답답함이라 할 수도.
따지고 보면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정재의 알뜰함도 한몫했다. 연애 때 그는 오래된 93년식 13년 차 구식 세피아, 빛바랜 자주색 세단을 타고 있었다. 겉멋에 큰 차나 새 차를 타지 않는 모습에 반했다. 그 중고차를 잘 유지하여 호주로 오기 전까지 무려 칠 년이나 더 타고 다녔다. 물건을 아끼고 알뜰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존경심까지 생기게 만든다. 덕분에 돈을 더 저축할 수 있었고 이민 정착자금으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남편은 회사에서 오버타임이 있어도 불만 없이 일했다. 남들 쉬는 공휴일에 추가로 할 일이 생겨도 거절하지 않고 매번 출근했다. 놀기 좋아하고 가성비 따지는 편재라면 쉬는 것을 선택했을 텐데. 이렇게 작은 돈도 소중하게 챙기고 다룬다.
하지만 아내를 지극히 소중하게 아끼는 성향 때문에 나의 활동 영역은 아주 좁혀졌다. 어딜 가도 같이 가야 하고 혼자 가게 되면 항상 자세한 보고를 올려야 한다. 그래서 내가 어디 혼자서 여행을 간다, 이런 것을 상상도 못 한다. 남들은 남편이 아내를 몇 달도 여행을 가라고 믿고 보내준다는데 그에게는 불가능하다. 여행을 좋아하는 편재 성향인 나에게는 아주 쥐약인 셈이다. 게다가 나를 너무 애착하다 못해 어떤 때는 집착하는 느낌도 든다. 이 남자 의처증 아닌가 살짝 의심이 생길만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우리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휴지통에서 목걸이도 구해준 남자인데, 평소에 아주 애틋하게 아내를 잘 챙기는 남편인데, 그런데 나는 참... 갑. 갑. 하다. 그래서 탈출하고 싶다. 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욕먹어도 싼 여자일까?
다음 편 예고
시드니 직장에선 만난 오피스 허즈번드
남편이랑 닮은 잘 생긴 오피스 허즈번드
그의 친절함과 달달한 미소에 빠져
혼자 김칫국을 신나게 마셔버린 이야기
다음 연재 글에서 만나요.
독자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특히 편집자 여러분 눈길 좀 주세요.
편집자님이 최고라고 말해줄 때까지 고고씽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