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byell Aug 04. 2022

스무 살 여름을 기억하는 법 | 수박 셔벗

대서 - 끝나지 않을 듯한 무더위

둥글게 모여 앉아 한 조각씩 손에 든다.


수박을 먹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커다란 수박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조각내기마저 귀찮은 날에는 수박을 반으로 잘라 수박 스푼으로 동그랗게 파낸다. 수박구슬을 잔뜩 만들어 내면 너나 할 것 없이 하나씩 입으로 가져간다. 그릇 모양으로 남은 수박껍질은 화채 그릇으로 쓰기에 그만이다. 이렇듯 수박은 다 같이 모여 앉아 먹는 과일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혼자 살기 시작한 첫해 여름, 그렇게 수박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나눠 먹을 사람은 없었고, 작은 원룸에 딸린 냉장고는 참 작았다. 더욱이 그때의 동네 마트에는 '소분 과일' 같은 좋은 대안이 없었다. 반통짜리 수박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그것마저도 혼자서 하루 만에 다 먹기엔 무리였다. 먹다 남은 수박은 그나마 서늘한 방 한쪽에 방치되었고, 다음 날 쯤에는 수박식초가 되어 있었더랬다. 그리고 이 유쾌하지 못한 시큼한 경험이 나에게 있어서 수박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기억이 되었었다.


지금이야 1/6등분 수박이라던가, 수박도시락이라던가, 작은 방에 사는 1인 가구에게도 친절한 옵션이 많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수박욕을 해소할 방법은 (시큼해진 수박을 제외하면) 카페에서 파는 수박주스가 유일했다. 수박 약간에 시럽과 얼음이 잔뜩 들어간 이 '수박주스'는 주스보다 수박향 슬러시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스무 살의 어린 나는 이 허술한 수박에도 만족할 줄 알았다.


시간이 흘러 부족함 속에서 만족을 찾지 않아도 되는 지금, 그 수박향 슬러시에도 행복했던 그 여름을 떠올리며 진짜 수박 셔벗을 만들어본다.




셔벗은 아이스크림과 달리 그 속에 '아작'하고 씹히는 얼음조각이 들어있다. 과일주스 속 수분이 먼저 얼면서 결정을 만들기 때문이다. 아주 무더운 여름날이면 잇속까지 얼려버리는 이 시린 얼음조각이 오히려 반갑다. 차가운 수박 셔벗에 오이까지 더하면 식감뿐만 아니라 보는 맛도 살아난다. 여름과일의 시그니처 컬러를 살린 셔벗으로 잠시나마 무더위를 잊어보자.


수박은 갈라 보기 전까지 그 속사정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넘쳐나는 '수박 고르는 꿀팁'을 전수받고도 매번 수박 고르기를 실패한다. 마트 직원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수박은 갈라보고 사는 게 제일 정확하단다. 그래서 그 꿀팁을 적극 수용해 잘라진 수박을 준비했다. 달콤함이 보장된 핑크빛 수박은 껍질과 씨를 제거해 잘 익은 속살만 준비한다.

오이는 껍질을 깎아 준비하는데, 약간의 허브를 더해 향과 맛을 한층 풍부하게 해 보자. 준비한 애플민트와 딜은 오이의 시원함을 살려주면서 세련된 느낌으로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애플민트는 여름에 어울리는 상쾌하고 시원한 향을 더해주고, 딜은 우디(woody)한 향이 나면서 세련된 느낌을 더해준다. 그렇게 한데 담긴 허브와 오이는 각자의 향이 어우러져 여름을 연상시킨다. 

각 재료는 믹서에 갈아주는데, 여름의 과일과 채소답게 수분이 가득해 별다른 저항 없이 갈린다. 시원하게 갈아낸 수박주스는 반절을 덜어 한쪽에는 레몬즙, 다른 한쪽에는 생크림을 넣어 맛에 변조를 준다. 딜이 들어간 오이 주스에는 크리미한 느낌이 어울릴 것 같아 생크림을 추가한다. 수박도 오이도 한 입 맛을 보며 레몬즙과 꿀을 취향껏 더한다. 


순식간에 완성된 3가지 맛의 주스를 각각 용기에 담에 냉동실에 넣으면 기다리는 일만 남는다. 조급해하지 말고 충분히 얼려 다시 한번 믹서에 갈아준다. 이렇게 다시 믹서에 갈면 너무 크게 씹히는 얼음조각들이 보다 먹기 좋은 상태로 정리된다. 한번 믹서에 갈린 두 가지 맛의 수박 셔벗은 한 용기에 나누어 담아 다시 얼리고, 오이 셔벗 역시 다시 차갑게 얼린다.

수박은 적당히 익으면 중심부가 분홍색이 된다. 수분을 충분히 머금고 아삭한 맛이 살아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달콤함이 가득하게 농익어 강렬한 빨강으로 물든다. 한 용기에 담긴 두 가지 맛의 수박 셔벗은 그 잘 익은 수박의 속 색과 닮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 오이가 수박 껍질의 색을 흉내 낸다. 색만 보더라도 이미 여름이 완성된 듯하다.


기다림의 시간 끝에 다시금 단단해진 셔벗을 한스쿱씩 크게 떠 담는다. 수박 셔벗은 핑크와 빨강이 교차되며 현실감 있는 수박색을 만들어 낸다. 비교적 적은 양으로 곁들여진 오이 셔벗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수박 셔벗의 맛과 색에 시원함을 더해준다. 그 위로 레몬 제스트를 아낌없이 올려 마무리하면 수박의 초록과 빨강이 잘 어우러진 셔벗 한 컵이 완성된다. 

무더위가 기승인 이맘때 뜨거운 오븐 앞에 설 일 없이 기다림만으로 완성된 수박 셔벗. 레몬의 상큼함으로 마무리된 셔벗의 시원함은 더위에 지친 하루, 입 속만이라도 차갑게 얼려준다. 


수박이 간절했던 스무 살의 여름을 떠올리며, 오늘의 수박 셔벗 완성이다.

이전 11화 뭉게구름을 기억하는 법 | 자두 파블로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