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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byell Sep 01. 2022

휴가를 기억하는 법 | 무모몽 파이

처서 - 따가운 해가 누그러드는 때

달리던 우리를 멈춰 세운 건 다름 아닌 현수막 하나였다.


'무화과 직판장'이라고 크게 쓰인 현수막은 전남의 시골길이면 어렵잖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직판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가진 우리는 잘 뚫린 어느 길가에 주저 없이 차를 세웠다. 휴가차 떠난 진도에서의 마지막 날, 우연히 만난 무화과가 우리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박스를 서슴없이 사서는 차로 돌아갔고, 바로 먹을 것 몇 개만 생수로 씻으려던 찰나, 뒤에서 직판장 주인아저씨가 다급하게 소리를 쳤다. '물에 씻으면 안 된다'는 외침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화과 하나를 그대로 입에 넣었다.


시장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과일은 덜 익은 채로 수확되어 유통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후숙 된다. 그래야 너무 무르지 않고 상품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판장에서 나오는 과일들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나무에서 무화과가 충분히 익기를 기다렸다 수확해 바로 판매한다. 그래서인지 이날 먹은 무화과는 그 어느 때의 무화과 보다도 달콤했다.


무화과(無花果)는 이름만 보자면 꽃이 없는 과일이지만, 실제로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 초록의 항아리 모양 껍질 속에 꽃술이 들어차 있고, 그 속의 꿀이 무화과를 달콤한 과일로 만든다. 실제로 무화과는 다른 과일의 새콤달콤함과는 달리 꿀과 같은 농후한 단맛이 난다.


여름휴가 마지막 날 우연히 만난 무화과는 여름휴가 끝자락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던 우리를 달콤하게 달래주었다. 1년 남짓 남은 다음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달콤한 제철 과일로 단짠단짠 눈물의 맛이 가미된 디저트를 만들어보자.

 



무화과는 치즈나 육류와 잘 어울리는 과일이다. 무화과에 포함된 효소가 단백질의 소화를 돕기 때문이다. 그 조화 살려 파이의 필링은 치즈로, 짠맛은 하몽으로 채웠다. 치즈 향의 필링은 전분을 더해 모찌리도후의 식감을 냈고, 직판장 무화과의 농후한 단맛은 토핑에 꿀을 더해 재현했다. 맛있는 것과 맛있는 것들의 만남이 맛이 없을 수 있을까.



파이 반죽은 복잡할 것 없이 모든 재료를 한데 넣고 반죽만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롤인 버터를 넣어 밀어 펴는 수고와 시간을 들여볼 참이지만, 이번에는 필링과 토핑의 조화가 주인만큼, 파이지는 단순하게 만들어 보자.

계란도, 크림도 빠진 기본에 충실한 반죽은 차가운 온도에만 신경 쓰며 빠르게 섞어준다. 버터와 우유가 만나면 진한 크림의 향이 나는데, 이 우유의 향은 언제 맡아도 기분 좋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자기 전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서 나는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다.


반죽이 끝나면 냉장고에서 충분히 차갑게 만들어준다. 군데군데 덩어리 진 버터가 나중에 반죽 사이 층을 만들 수 있게 말이다. 버터가 굳을 정도로 차가워진 반죽은 원하는 틀에 맞추어 모양을 잡는다. 아래쪽이 솟아오르지 않도록 바닥에 구멍을 내는 것도 잊지 말자.

필링 채우지 않고 틀만 먼저 구워줄 텐데, 높은 온도에서 빠르게 구워 파이 반죽 사이사이 층을 만들어 준다. 단순하게 만든 반죽이지만, 나름 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만들어지는 걸 보면 항상 신기하다. 노릇하게 구워지며 살짝 부풀어 오른 6개의 파이는 오븐에서 빼 충분히 식혀준다.


파이가 식는 동안 치즈 필링을 만들어보자. 크림치즈와 우유를 베이스로 하고, 모찌리도후의 느낌을 살려주기 위해 연두부와 전분도 추가한다. 연두부는 얼핏 색도 식감도 맛도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입안에 들어가면 특유의 향을 뿜어낸다. 많이 넣을 필요 없이 크게 한 스푼이면 두부의 콩 내음을 내기에 충분하다.

전분은 열이 닿으면 쉽게 응어리지는데, 때문에 필링을 중간에 한번 체에 걸러주는 편이 좋다. 그리고 너무 꾸덕해지지 않도록 상태를 계속 살펴야 한다. 열심히 저을수록 매끈하고 부드러운 필링이 완성되기 때문에, 오른손 왼손 할 것 없이 열과 성을 다해 저어주자. 그러다 보면 틀은 충분히 식고, 필링은 윤기가 흐를 것이다.


매끈하고 쫀득하게 완성된 치즈 필링은 미리 만들어 둔 파이지에 가득 채워준다. 새벽 눈이 내린 듯 새하얀 치즈와 잘 구워져 노릇한 파이지의 색감은 서로 대비되며 말끔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보다 보기 좋게 윗면을 평평하게 만들어 냉장고에 굳힌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완성이 머지않았다. 위에 올릴 토핑은 크게 손이 갈 부분이 없기 문이다. 금방이라도 벌이 날아들 것 같은 달콤한 무화과를 손질하고, 훈연 향이 가득한 하몽을 적당히 잘라주면 된다. 무화과는 무른 과일이라 곰팡이가 쉽게 생기기 때문에 한번 겉을 씻어 지저분한 부분을 도려낸다. 꼭지를 자르고 반을 가르면 예쁜 다홍색의 속을 만날 수 있다. 무화과의 숨겨진 꽃을 발견한 셈이다.

하몽은 무화과에 감을 수 있게 준비하고, 꿀도 적당량 준비한다. 치즈 필링이 단단해진 파이 위에 준비된 토핑을 올려준다. 하몽을 감아도 좋고, 무화과를 탑처럼 쌓아도 좋다. 무화과의 동그란 단면을 파이지 위로 가득 채워주는 것도 재미있는 모양새를 만드는 방법이다. 어떤 방식이든 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완성된 파이의 새하얀 치즈 필링을 도화지 삼아 그 위로 무화과의 숨은 꽃이 만발한다. 무화과의 꽃을 탐하듯 감아낸 하몽과 꿀을 곁들여 한입 베어 문다. 그 한 입에 치즈 필링은 맛의 중심을 잡아주고, 하몽이 짭조름한 맛의 포인트를 살려낸다. 자칫 뒤로 숨어버릴 수 있는 무화과의 맛을 꿀이 손을 잡고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무모몽 파이는 마냥 달콤하지도, 그렇다고 눈살이 찌푸려지게 짠맛도 아닌 단짠단짠 행복과 눈물 그 사이를 걷는다.


그 끝이 분명해 슬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달콤한 여름휴가처럼 달콤 짭짤한 무화과 - 모찌리도후 - 하몽 파이, 무모몽 파이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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