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 - 낱알을 구워내는 볕
비단 영화 속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장면에서도 장마 끝에 더운 볕이 내리쬘 때면 옥수수가 그 아래에서 따글따글 익어간다. 늦여름 태양빛에 잘 구워진 옥수수는 낱알뿐만 아니라 수염도 노랗게 물이 든다. 갈색으로 수염의 색이 짙어진 옥수수만 골라서 수확한다면 껍질을 까 보지 않더라도 잘 익은 녀석으로 고를 수 있다. 영화 속 할머니도 아마 수염의 색을 보고 그 속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옥수수를 직접 딸 기회가 생겼다. 막상 맞닥뜨린 옥수수 따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로망에 가까웠던 기대는 옥수수 잔털에 닿아 올라온 두드러기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다시는 내가 옥수수 딴다고 안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잔뜩 지쳐서는 옥수수를 몇 개 쪘는데, 그때 먹은 제철 옥수수의 맛을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설탕 없이도 달콤함이 가득하고 아삭아삭 씹히는 사이 터지는 과즙이 여느 과일 못지않았다. 갓 딴 옥수수를 바로 찌면 이렇게나 감동적인 맛이구나. 두드러기를 잠깐 있었더랬다.
쿠키슈는 처음 먹은 한 입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속은 촉촉하고 겉은 바삭한, 이것이 바로 궁극의 베이킹이겠구나 싶은 맛이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평범한 슈에 버터 가득한 쿠키 반죽을 더해서 구운, 특별할 것 없는 디저트이다. 하지만 처음 먹은 쿠키슈의 감동을 떠올리며 처음으로 직접 딴 햇 옥수수의 감동을 더해 감동 두배의 레시피를 만들어보자.
옥수수는 알맹이만 발라내어 준비한다. 큰 옥수수 하나면 충분하다. 어디선가 본 팁으로 옥수수를 세로로 갈라 알맹이를 떼어냈다. 나름 잘 분리되지만, 조금이라도 힘이 과하면 초당옥수수의 과즙이 온 얼굴을 덮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개나리색과 하얀색의 조화가 귀여운 옥수수를 보면 그 정도는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옥수수는 약간의 우유와 함께 갈아 과즙만 따로 준비한다. 이때 우유의 양이 적을수록 옥수수의 향은 강해진다. 최소한의 우유만 사용해서 옥수수 밀크를 만들어준다.
그다음 슈 반죽을 만들기 위해 우유에 버터를 넣고 불에 올린다. 우유가 끓고 버터가 녹으며 고소한 향이 진하게 풍긴다. 여기에 밀가루를 넣고 타지 않게 잘 젓는다. 충분히 호화된 반죽은 반투명한 모양새와 함께 눅진한 느낌의 향을 낸다. 우유와 밀가루가 열에 익어가는 냄새이다.
아직 뜨거운 반죽에 계란을 넣어 반죽을 마무리한다. 계란은 정해진 양이 없다. 휘퍼로 저으면서 적당하게 꾸덕한 느낌이 들 때까지 조금씩 추가하며 저어준다. 누군가 베이킹은 정밀한 계량이 생명이라고 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한국요리에만 있을 것 같은 '적당히'를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슈 반죽이 준비되면 미리 만들어 둔 쿠키 반죽을 위에 올린다. 옥수수와 어울리는 쿠키는 무엇일까 고민하다, 카라멜 쿠키를 만들기로 했다. 크림이 들어간 달콤하고 향긋한 카라멜이 아닌 씁쓸하고 투명한 맛의 태운 설탕을 카라멜로 사용했다. 옅은 초당옥수수의 향을 가리지 않으면서 자칫 지나칠 수 있는 단맛을 눌러줄 씁쓸한 맛을 가지고 있어 적당한 재료라고 생각했다.
쿠키슈의 쿠키 반죽에는 보통의 쿠키에 비해 버터가 더 많이 들어간다. 바삭한 식감과 감동적인 맛은 바로 이 버터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많은 양의 버터 때문에 손에 닿으면 순식간에 반죽이 녹아 흘러내린다. 녹은 반죽은 다루기 힘들니 손이 닿는 과정 사이사이에 반죽을 차가운 곳에서 충분히 굳혀주자. 반죽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다.
충분히 단단해진 쿠키 반죽을 동그랗게 잘라 슈 반죽 위에 올린다. 이제 구워주면 된다. 190℃로 예열된 오븐에서 30분간 굽는다. 혹여나 굽는 도중에 부풀어 오르는 슈를 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문을 여닫으면 안 된다. 문을 여는 순간 슈가 납작하게 주저앉기 때문이다. 수증기의 힘으로 부풀어 오르는 슈는, 문을 열면 수증기와 열이 빠져버린다. 동글동글 부풀어 오른 귀여운 양배추 모양을 보려면, 오히려 보고 싶은 그 마음을 꾹 참고 한발 물러서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다.
우유와 버터로 만든 슈 반죽과 버터가 잔뜩 들어간 쿠키 반죽은 오븐 안에서 세상 고소하고 달콤한 향을 낸다. 그 기분 좋은 향기 끝에는 2배는 부푼 모습으로 완성된 슈가 기다리고 있다. 슈 위로 얇게 퍼진 쿠키 반죽은 보기만 해도 바삭하다. 이제 이 향긋파삭한 반죽 안을 가득 채워줄 크림을 만들어보자.
미리 만들어 둔 옥수수 밀크로 커스터드를 만든다. 초당옥수수의 옅은 향과 노란 빛깔은 커스터드라는 이름으로 진하게 농축된다. 충분히 식은 커스터드에 생크림을 섞어 기분 좋은 가벼움을 더해준다. 완성된 크림은 입에 넣자마자 옥수수 특유의 녹말 향이 코끝을 살풋 스친다. 이 여리고 연약한 향을 잠깐 즐기고 이내 슈 안 가득 채워낸다.
향긋하고 달지 않은 옥수수크림과 바삭 달콤한 쿠키슈 반죽은 한입 베어 물면 어느샌가 없어져있다. 그저 접시 위에 수많은 쿠키 조각만 남아있을 뿐이다. 토핑으로 올려둔 옥수수 한 알이 우연히 같이 씹히는 순간에는 부드러운 식감 사이로 '팡'하고 색다른 재미와 과즙이 함께 씹힌다.
쿠키슈의 처음과 옥수수의 처음이 만나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초당옥수수 쿠키슈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