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보다 나은 나만의 것
화장실은 남에게 보이기 싫은 것들을 없는 듯이 처리할 수 있는 공간이다. 간단하게 물을 내려버리면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없는 것이 된다.
이처럼 편리한 곳이니 회사 화장실에 언제나 칸이 부족한 것은, 회사원에게는 하루하루 처리할 것들이 늘상 넘쳐서인지도 모른다.
입사한지 3년이 흐른 지금, 회사 화장실로 달려가 울었던 기억이 3번 있다.
3번 모두 누군가가 나에게 심한 말을 해서도 아니었고, 나에게 서류뭉치를 던져서도 아니었고, 심혈을 기울인 프로젝트가 망해서도 아니었고, 일단 그건 울만큼 드라마틱한 일도 아니었다. 그 3번의 공통점은 단지, 너무 일을 하기 싫어서였다.
그래,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몰래 울고 나올 만큼 일을 하기가 싫었다.
신입 시절 막막한 보고를 앞두고 선배가 날 외면했을 때나, 첫 출장의 부담감에 시달렸을 때, 새로 옮긴 부서에서 쏟아지는 일을 감당하지 못해 버거웠을 때 내가 울었던 것은 인간적 모멸감이나 설움 따위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지긋지긋하고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이 일을 마무리할 답이 보이지 않는데 답이 있어서 어떻게 넘긴다고 해도 앞으로 반복될 또다른 일들로부터 도망칠 구멍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너무너무 답답한 기분이 들 때 나는 혼자 있을 곳이 필요했고 회사에서 그런 곳은 화장실이 유일했다.
실은 지난주가 그 3번 중 한 번이었는데, 워크샵을 준비하고 몰려드는 업무를 쳐내다 보니 문득 하루종일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원이 자꾸만 놓치게 되는 것이 또 화장실 갈 시간인데, 회의와 보고, 취합의 연속을 흘려보내다 보면 그렇기도 하고, 계속 ‘아, 이것만 끝내고 가자’하는 마음으로 미루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동기중엔 “화장실 참지 말고 다녀오기!”라고 모니터 옆에 메모를 붙여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왠지 깨닫고 나니 온갖 설움이 밀려오면서 ‘아, 더는 못하겠다’하는 생각과 함께 눈물이 쏟아졌다.
가장 무서운 건 더이상 못하겠는데도, 절대 그렇게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 마스크를 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화장실로 향하는 수밖에.
모든 메일과 메신저를 무시한 채 잠깐 울고 나니까, 그래도 좀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내 능력 밖의 일을 하려고 나보다 월급을 더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노트북을 들고 나에게 업무를 지시한 상사에게 가서,
“차장님, 이건 도저히 모르겠어서 같이 보려고 가져왔습니다”.
말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다. 거짓도 아니고, 예의 없지도 않았다. 단지 좀 무능력할 뿐.
그런데 더 놀랍게도, 이건 그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와 함께 답을 찾으려고 한참을 여기저기 묻고 씨름하던 그는,
“아 이건 뭐 그냥 이렇게 볼 수밖에 없네...확실히 알 수가 없네요”
라는, 가장 허무하고도 가장 후련한 결론을 내렸다. 마치 우렁차게 내려가는 화장실의 물소리처럼.
결국 그 일은 며칠 뒤에 자연스럽게 회의 안건으로 올려졌고, 결론이 내려졌고, 그렇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업무 하나 치웠다고 내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는 능력을 하나 더 탑재했다.
모르는 일을 시킨 사람에게 들고가서 묻기.
그 사람이 모를 경우 더 이상 그 업무는 나 혼자만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공동의 과제가 되고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음.
또하나는, 더이상 이 모든 걸 참을 수 없어진 내가 회사 밖의 일들을 시작했다는 것.
[직장인의 기분]을 연재하는 것도 그 일의 하나다. 회사와 일에 묻혀서 더는 도망칠 곳이 없을 때, ‘내 것’,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화장실보다는 쾌적하고 자랑스러운 것이었으면 해서.
사람은 급하게 달려갈 화장실 한 칸이 필요하고, 그건 때로 꽤나 유용하지만, 계속 그것을 유일한 대안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나은 무엇이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나에게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