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장의 본산이 국가자본주의로 선회한 이유
20세기 후반의 미국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수호자였습니다. 정부는 최소한의 규제자 역할에 머물고, 민간 기업의 창의와 경쟁을 보장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신념을 전 세계에 퍼뜨렸습니다.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의 다자 체제를 뒷받침하며, 미국은 개방과 자유무역이 번영의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이러한 신념은 급격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제 더 이상 시장을 방치하지 않고,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조율자’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기술 패권 경쟁과 공급망 위기, 그리고 정치적 압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미국의 변화는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랫동안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핵심 소프트웨어인 전자설계자동화(EDA, Electronic Design Automation) 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제조 영역에서는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가 선두를 달렸고, 첨단 장비와 소재에서는 네덜란드와 일본 기업들이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글로벌 분업 체제에서는 효율적이었지만, 지정학적 위험이 커질수록 미국은 이 구조를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중국이 막대한 보조금과 정책 지원으로 반도체 굴기를 추진하면서, 미국의 기술 우위를 위협하는 현실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미국은 2022년 “반도체 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은 390억 달러에 달하는 제조 보조금, 130억 달러의 연구개발 자금, 그리고 세액 공제를 통해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이제 미국은 자유시장 국가라기보다는 전략 산업에 직접 투자하고, 보조금을 제공하며, 기업의 경영 전략에 조건을 거는 조율자로 변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는 칩스법 보조금을 신청하는 기업들에게 세부 조건을 달았습니다. 중국에 대한 기술 이전을 하지 않을 것, 일정 기간 중국 내에서 첨단 공정을 새로 짓지 않을 것, 그리고 보조금을 받은 금액 일부를 미국 내 지역사회에 환원할 것 등이 그 조건입니다. 이는 정부가 단순히 지원자가 아니라 기업 경영에 직접 개입하는 행위로, 전형적인 국가자본주의의 특징입니다. 과거라면 시장이 스스로 조율하도록 맡겼을 사안들을 이제 정부가 조율하고 있습니다.
희토류와 배터리 등 자원 전략에서도 미국의 태도는 바뀌었습니다. 미국은 자국 내 유일한 희토류 광산 기업인 MP 머티리얼스(MP Materials)에 국방부 자금을 투입하고 장기 구매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의 안정적 공급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배터리의 경우, 미국은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을 통해 전기차 보조금을 ‘북미 최종 조립’과 ‘우방국 광물 조달’이라는 조건과 연결했습니다. 다시 말해, 보조금을 받으려면 중국이 아닌 미국이나 동맹국에서 광물을 조달하고, 북미에서 차량을 생산해야 합니다. 이런 조건부 정책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원리에 맞지 않지만, 미국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과 투자 규제에서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2023년 미국 정부는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컴퓨팅과 같은 분야에 대해 중국으로의 미국인 투자와 기술 지원을 제한하는 ‘아웃바운드 투자 심사 제도’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외국인 투자가 미국 내에 들어오는 것을 심사하던 제도(CFIUS, Committee on Foreign Investment in the United States)의 반대 개념입니다. 이제는 미국 자본과 기술이 해외로 흘러나가는 것까지 통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자본의 흐름이 자유롭다는 자유시장 원리를 거부하고, 안보를 이유로 국가가 양방향에서 관리하겠다는 태도는 미국 경제정책의 큰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미국의 변화를 두고 학자들은 “국가자본주의의 귀환”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미국식 국가자본주의는 중국식과는 다릅니다. 중국이 국유기업을 중심으로 산업 전체를 통제하는 전면적 동원 체제라면, 미국은 민간의 창의성과 혁신을 존중하면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에서는 정부가 강력하게 개입하는 부분적 개입 체제를 취합니다. 미국은 여전히 시장의 역동성을 믿지만,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그 위에 거대한 틀을 씌운 것입니다.
왜 미국은 자유시장의 수호자에서 조율자로 변했을까요. 첫째, 기술 패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입니다. 인공지능, 반도체, 배터리 같은 분야는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며, 이를 민간 자율에만 맡기기에는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둘째, 팬데믹과 전쟁은 공급망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국가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셋째, 정치적 요인도 있습니다. 일자리 창출과 산업 부흥은 유권자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주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들은 정부 개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국가의 개입은 전략적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할 수 있지만, 동시에 시장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정치적 고려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기업들은 보조금과 규제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고, 글로벌 공급망은 정치적 블록화로 인해 효율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자유시장과 국가개입의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가 앞으로 미국 경제의 성패를 좌우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미국은 더 이상 과거처럼 시장을 무조건 신뢰하는 수호자가 아닙니다. 이제 미국은 국가안보와 산업정책을 연결하며, 조율자로서 직접 개입합니다. 이는 단순히 경제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미국이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새로운 전략입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신념 위에 안보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층위가 덧씌워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