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다시 시장에 뛰어든 이유
20세기 말 세계 경제를 지배한 이념은 자유시장 자본주의였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찾는다”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자유시장 체제에서는 정부가 최소한의 규제자 역할에 머물고, 기업은 자율적인 경쟁을 통해 혁신과 성장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질서의 대표적인 제도가 바로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입니다. 1995년 설립된 세계무역기구는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를 확산시키며 “개방된 시장이 모두를 풍요롭게 한다”는 이상을 제도화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질서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생산 기지는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고, 첨단 기술은 소수 국가와 몇몇 기업에 집중되었습니다. 이 구조는 평시에는 효율성을 높였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전 세계적 전염병 유행),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이러한 집중 구조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한 국가가 특정 기술이나 자원을 무기화하면, 다른 나라는 단숨에 마비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등장한 개념이 바로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입니다. 국가자본주의란 단순히 국가가 기업을 규제하는 수준을 넘어, 국가가 직접 소유자, 투자자, 조율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체제를 의미합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에서는 국가는 심판자이고 기업은 선수라면, 국가자본주의에서는 국가는 심판을 넘어 직접 선수로 뛰어들어 경기를 지휘합니다. 국가는 필요하다면 기업의 지분을 매입하고, 전략 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며, 심지어 기업의 경영에도 간섭합니다.
역사적으로 국가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는 중국, 러시아, 그리고 싱가포르입니다.
중국은 “국유기업(State-Owned Enterprises, SOEs)”이라 불리는 대형 기업들을 통해 금융, 통신, 에너지, 철강 등 국가 전략 산업을 장악해왔습니다. 이들 기업은 단순히 수익을 내는 조직이 아니라, 국가 전략을 수행하는 도구입니다. 예컨대 통신장비 기업 화웨이는 민간기업이지만, 중국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금융 후원을 받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러시아는 천연가스와 석유 같은 자원을 무기 삼아 국가가 직접 통제합니다. 가스프롬(Gazprom) 같은 국영기업은 러시아 정부의 외교·안보 전략을 지원하는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에너지 공급을 무기화함으로써 유럽을 압박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싱가포르는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 즉 국가가 직접 운용하는 기금을 통해 전 세계 기업에 투자합니다. 싱가포르의 대표적 국부펀드인 테마섹(Temasek)은 단순히 투자 수익을 내는 기관이 아니라, 국가 전략과 산업 발전의 기둥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국가자본주의는 주로 신흥국의 특수한 체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놀라운 변화는 자유시장의 본산이라 불리던 미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민간의 혁신을 정부가 건드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 전략 산업에서는 노골적으로 국가자본주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반도체 산업입니다. 미국 정부는 2022년 “반도체 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은 약 390억 달러(한화 약 50조 원)를 반도체 공장 건설 보조금으로 지원하고, 약 130억 달러(17조 원)를 연구개발에 투입하며, 약 250억 달러(33조 원)에 달하는 세제 혜택을 제공합니다. 단순한 산업 육성을 넘어, 반도체를 국가 안보의 핵심 자산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심지어 인텔에 대해서는 최고경영자(CEO) 교체 요구나 정부의 지분 매입 논의까지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민간기업의 경영에 직접 개입하는 전형적인 국가자본주의적 행태입니다.
희토류(rare earth elements) 사례도 있습니다. 희토류란 스마트폰, 전기차 배터리, 군사용 레이더와 미사일 등 첨단 산업에 필수적인 17가지 금속 원소를 말합니다. 미국은 사실상 유일한 희토류 광산 기업인 MP 머티리얼스(MP Materials)에 국방부 자금을 직접 투입하고, 장기 구매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는 국가가 민간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직접 자원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중국과 비교하면 두 모델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는 “국가가 곧 시장의 주인”이라는 형태입니다. 국유기업을 중심으로 국가가 산업 전체를 소유하고 지휘합니다. 반면 미국식 국가자본주의는 민간의 자율성을 유지하되, 특정 전략 산업에서는 국가가 조율자이자 투자자로서 강력하게 개입합니다. 즉, 중국은 전면적 동원, 미국은 선택적 개입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체제 모두 “국가가 시장의 핵심”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왜 국가는 다시 경제 전면에 등장했을까요? 첫째, 미중 패권경쟁이라는 지정학적 경쟁이 첨단 기술을 안보 자산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배터리 같은 기술은 단순한 경제재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무기가 되었습니다. 둘째, 첨단 산업은 초기 투자 규모가 너무 크고 위험하기 때문에 민간 자율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반도체 공장은 수십조 원이 필요한 초대형 프로젝트이고, 실패의 위험이 크기에 국가 지원 없이는 추진하기 어렵습니다. 셋째, 팬데믹과 전쟁이 보여주었듯 특정 국가 의존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급망의 다변화와 자국 내 생산 기반 확보는 국가의 책무로 인식됩니다. 넷째, 정치적 이유도 큽니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 기술 자립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적인 성과를 보여줄 수 있고, 이는 정치적 정당성 강화로 이어집니다.
물론 국가자본주의에는 한계도 있습니다. 국가의 과도한 개입은 시장의 효율성을 왜곡할 수 있고, 기업의 창의성과 경쟁력을 저하시킬 수 있습니다. 정치적 고려가 경제적 합리성을 압도하는 순간 비효율과 낭비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미 국가자본주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시대가 저물고, 국가자본주의의 귀환이 시작되었습니다. 국가는 더 이상 경기의 심판자에 머물지 않고, 직접 선수로 뛰어들어 규칙을 새롭게 쓰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경제 모델의 전환이 아니라, 국제질서 전체의 재편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 희토류 같은 핵심 기술이 “안보재(안보를 위한 자원)”로 다루어질수록, 국가는 시장에 더 깊숙이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