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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안보가 된 순간

경제와 안보의 경계가 무너진 새로운 질서

by 드라이트리

20세기 후반의 기술 담론은 생산성 향상과 기업 성장이라는 경제적 프레임 안에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도체, 통신, 인터넷, 배터리 같은 혁신은 산업 경쟁력을 높이고 고용을 늘리는 수단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기술은 더 이상 경제의 하위 범주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상위 개념으로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기술은 국제정치의 힘의 구성요소가 되었고, 공급망은 효율의 사슬이 아니라 억제와 강제의 사슬로 변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술의 안보재화라는 변곡점을 마주합니다.


세계화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대표하던 다자 규범은 자유무역의 이상을 제도화했고, 각국은 비교우위에 따른 효율적 분업으로 상호 번영을 도모했습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통과하며 균열이 드러났고, 특히 미국은 WTO 상소기구 운영과 해석을 둘러싼 불만을 누적시켰습니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상소기구가 회원국의 권리와 의무를 왜곡해 왔다고 공세적으로 비판했고, 그 결과 분쟁해결 메커니즘은 사실상 마비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다자 규범의 약화는 곧 국가가 직접 규칙을 설계하는 시대, 즉 경제의 지정학화로 이어졌습니다. 이 흐름은 팬데믹,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의료장비와 백신, 반도체 원재료와 배터리 핵심 광물, 곡물과 에너지까지 특정 지역과 기업에 과도하게 집중된 구조가 공급망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각국은 효율보다 안보를 우선하는 정책으로 급격히 선회했습니다. 미국 재무장관 재닛 옐런이 2022년에 내건 프렌드쇼어링 구상은 이러한 전환을 가장 간명하게 상징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끼리 생산과 투자를 재배치해 지정학적 충격을 흡수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공급망이 전장으로 변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2022년 전쟁과 항만 봉쇄로 우크라이나의 네온 정제가 멈추자 전 세계 반도체 노광용 레이저 가스 공급이 흔들렸습니다. 글로벌 치프 쇼티지의 잔불 위로 산업 전체가 다시 불안에 떨었습니다. 2023년에는 중국이 갈륨과 저마늄에 수출 통제를 걸며 서방의 반도체·광통신 체인을 정조준했습니다. 2010년 희토류 대일 수출 중단 사태 이후 다시 한 번 원자재를 외교·안보 수단으로 활용한 장면입니다. 이 일련의 사건은 원재료에서 공정장비, 소프트웨어, 표준과 데이터까지 전 영역이 얽힌 상호의존이 얼마나 쉽게 무기화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상호의존의 무기화라는 개념을 정립한 퍼렐과 뉴먼은 금융 메시징과 인터넷 라우팅 같은 네트워크의 초점 지점을 장악한 국가가 타국을 압박할 수 있다고 분석했는데, 오늘날 반도체 공급망은 그 논리를 실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다시 선수로 뛰어드는 과정은 제도와 법, 돈의 언어로 뚜렷합니다. 2022년 10월 7일 미국은 중국의 첨단 반도체 역량을 겨냥한 포괄적 수출통제를 도입했고, 2023년과 2024년에 걸쳐 구멍을 보완하는 개정안을 연속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통제는 고성능 AI 가속기부터 첨단 공정 장비, 그리고 미국인의 특정 기술 지원 행위까지 걸어 잠그는 촘촘한 그물입니다. 장비 공급의 병목을 쥔 네덜란드도 대중 수출 제한을 확대했고, 장비 독점 기업인 ASML은 미국의 규제 업데이트가 자사 대중 매출에 미칠 영향을 공시로 설명해야 했습니다. 유럽연합은 자체 칩스법을 통해 2030년까지 공공·민간 합계 430억 유로를 동원하겠다고 선언했고, 미국은 칩스·사이언스법으로 제조 보조금 390억 달러, 연구와 인력에 130억 달러, 그리고 장비 투자에 25퍼센트 세액공제를 묶어 반도체 제조를 다시 자국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 제도적 묶음은 단순한 산업정책을 넘어, 기술을 국가 안보 인프라로 다루는 새로운 표준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배터리와 에너지 전환에서도 안보화는 구조화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청정전력 투자세액공제와 생산세액공제를 대폭 연장·개편하며, 북미 최종 조립과 핵심 광물의 우방 조달을 조건으로 전기차 세액공제를 부여하는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국산화 비중을 채우는 기업에는 보너스 크레딧을 얹고, 광물 기원 규정을 단계적으로 엄격히 하되 산업 적응을 위한 유예와 세부지침을 계속 업데이트하는 방식으로 공급망 이전을 유도합니다. 유럽은 그린딜 산업계획과 넷제로 산업법을 통해 청정기술 제조 역량을 역내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정책의 설계도는 다르지만 지향은 같습니다. 에너지 전환의 핵심 부품과 소재, 제조 기반을 안보 관점에서 전략화한다는 점입니다.


이제 기술의 안보재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산업별로 들여다보겠습니다. 반도체는 그야말로 21세기의 석유라 불릴 만합니다. 설계는 미국 팹리스 기업들과 전자 설계 자동화(EDA)가 주도하고, 최첨단 제조는 대만과 한국, 장비는 미국과 네덜란드, 소재는 일본과 한국 등 소수 공급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한 노드만 틀어막아도 전체 네트워크가 흔들립니다. 미국의 10월 7일 통제는 AI 가속기 성능지표, DUV·EUV 노광장비, 선단 공정에 필요한 에칭·증착·측정 장비와 관련 인력의 기술 제공까지 포괄합니다. 여기에 네덜란드의 추가 통제가 겹치며 중국의 최첨단 공정 진입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동시에 미국과 유럽, 한국, 일본은 칩스법과 각국 세제, 보조금, 인력 양성 패키지로 자국 내 제조 기반을 확충하고 있습니다. 효율의 분업 대신 복원력과 통제가 우선되는 설계입니다.


배터리와 핵심 광물은 자원 지정학의 새 무대입니다. 중국은 정제와 중간재에서 독보적 우위를 확보해 왔고, 2023년에는 갈륨·저마늄 수출 통제를 도입해 서방의 광통신·반도체 체인을 압박했습니다. 희토류는 2010년 대일 수출 중단 파동과 WTO 분쟁을 거치며 이미 전략화된 소재임을 입증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은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그린딜 산업계획과 더불어 역내 정제와 재활용, 대체소재 개발을 촉진하고, 제3국과의 파트너십으로 공급원을 다변화하는 전략을 병행합니다. 광물의 지도는 기술 패권의 지도와 겹치고, 인도태평양의 광산과 가공시설, 항만과 금융까지 정책의 사정권에 들어옵니다.


보이지 않는 무기라 불리는 AI·데이터·양자 영역에서도 국가의 개입은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수출통제와 더불어 미국은 2023년 8월의 행정명령을 출발점으로 2024년에 최종 규정을 확정해 2025년부터 대중국 반도체·AI·양자 분야의 미국인 해외투자를 선별적으로 신고·금지하는 ‘아웃바운드 투자 심사’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전통적 외국인투자심사, 즉 CFIUS(미국 외국인 투자 심사 제도; Committee on Foreign Investment in the United States)의 인바운드 심사를 보완해 기술과 자본의 흐름을 양방향에서 관리하는 새로운 틀입니다. 데이터와 클라우드, 모델 훈련 인프라, 암호와 양자 내성 기술까지 안보의 편제에 편입되는 광경은 기술의 안보재화가 얼마나 깊숙이 일상과 시장을 재구성하는지 보여줍니다.


한국의 시야에서 보면 이 전환은 더 절실합니다. 한국은 메모리 중심 반도체 강국이자 배터리 삼각편대를 보유한 제조대국으로, 공급망 전환의 파고를 정면으로 맞고 있습니다. 정부는 2023년 이후 이른바 K-칩스 세제 개편으로 국가전략 기술 투자 공제율을 높이고, 2024년에는 반도체 설비·R&D 투자 촉진을 위한 한시 공제를 연장했습니다. 2024년 5월에는 26조 원 규모의 금융·세제 패키지를 발표했고, 2025년에는 반도체 세제 확대 법안이 추가로 처리됐습니다. 산업정책이 곧 안보정책이라는 명제가 제도화되는 과정입니다. 다만 이것이 단순한 보조금 경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기 조달, 공공 구매, 인력·전력 인프라, 교육체계, 표준과 규제의 정합성이 함께 맞물려야 안정적인 안보-경제 복합체가 작동합니다.


기술의 안보재화를 이론의 언어로 정리해 보면 두 축이 도드라집니다. 첫째는 지경학입니다. 블랙윌과 해리스가 정리한 대로, 국가는 관세·보조금·투자제한·금융제재·표준과 규범 같은 경제 수단을 외교·안보 목적을 위해 체계적으로 사용합니다. 둘째는 상호의존의 무기화입니다. 글로벌 네트워크의 병목과 감시 지점을 장악한 국가는 타국의 선택지를 제한하고 정책 변화를 강제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이 결합하면 기술, 자본, 데이터의 흐름 전체가 전략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칩스법, 수출통제, 아웃바운드 심사, 프렌드쇼어링, 넷제로 산업법, 경제안보법은 각기 다른 얼굴을 한 하나의 체계, 곧 기술-안보 복합체의 구축 과정입니다.


이 흐름이 장기 트렌드인지 일시적 사이클인지에 대한 논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팬데믹, 기후위기, 지정학적 분할이라는 구조 요인을 고려하면, 자유무역의 완전한 복귀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효율보다 복원력, 비용보다 억제력, 개방보다 신뢰가 의사결정의 키워드가 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첨단 기술의 민군 경계가 흐려지고, 자본 시장이 국경의 벽을 다시 만지며, 표준과 데이터 거버넌스가 연합과 블록 단위로 분절되는 현상이 심화될 것입니다. 기술기업은 더 이상 단지 수요와 비용을 고려해 공장을 지을 수 없습니다. 국경의 선과 동맹의 지형을 고려한 입지, 규제의 세부 문구와 표준의 방향, 보조금의 조건과 상호주의의 기준이 사업 전략의 중심으로 올라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기술의 안보재화는 누구에게 어떤 선택을 강제하는가. 정부에게는 표적을 명확히 하는 능력, 재정을 전략화하는 능력, 외교를 산업정책과 묶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기업에게는 다중 규정 준수와 공급망 재설계를 감내하는 내구성, 정치 리스크를 숫자로 환산하는 역량, B2G 수요와 민간 혁신을 동시에 잡는 이중 전략이 필요합니다. 투자자에게는 재무제표 너머 정책의 맵과 지정학의 흐름을 읽는 감각이 요구됩니다. 이 모든 선택의 바탕에는 하나의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기술은 더 이상 경제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핵심 자산이며, 국가는 더 이상 심판이 아니라 선수라는 사실입니다.


기술이 안보가 된 순간, 세계경제의 규칙은 바뀌었습니다. 다자 자유무역의 약화와 공급망의 블록화, 지경학과 상호의존의 무기화가 맞물리며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 우리는 이 새로운 질서를 모델과 사례를 통해 더 세밀하게 해부할 것입니다. 국가자본주의의 귀환과 미국식·중국식 경로의 차이, 반도체와 배터리, AI와 데이터, 희토류의 전장화, 그리고 한국이 선택해야 할 전략을 차례로 탐구하겠습니다. 그 여정의 출발점이 바로 지금 이 문장입니다. 기술은 무기이고, 공급망은 전장입니다. 그리고 그 전장은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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