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에서 반도체로, 전략 자산의 세대교체
반도체는 이제 21세기의 석유라 불립니다. 20세기 석유가 자동차와 전력, 산업 전반을 움직이는 동력이었다면, 21세기의 반도체는 인공지능, 스마트폰, 슈퍼컴퓨터, 군사 장비까지 현대 문명의 거의 모든 영역을 작동시키는 핵심 부품이자 전략 자산입니다. 한 개의 작은 칩 안에는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 있으며, 이 미세한 부품이 없이는 국가 경제와 안보가 마비될 수 있습니다. 과거 석유 파동이 국제정치의 지형을 바꿨던 것처럼, 반도체 공급망 역시 오늘날의 세계 질서를 규정하는 결정적 변수로 떠올랐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태생적으로 글로벌 분업 체제 위에 세워졌습니다. 미국은 설계와 소프트웨어, 특히 전자설계자동화(EDA, Electronic Design Automation) 툴에서 독보적 우위를 갖고 있습니다. 대만은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 TSMC를 중심으로 최첨단 제조 능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을 담당합니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와 일부 장비에서 여전히 중요한 공급국이고, 네덜란드의 ASML은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violet) 노광 장비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가별로 역할이 분리된 구조는 효율적이었지만, 동시에 특정 지점이 흔들리면 전체 체인이 무너질 수 있는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 취약성이 팬데믹과 지정학적 갈등을 거치며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공장 셧다운과 물류 대란으로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은 칩 부족 사태에 직면했고, 군수·통신 장비에도 차질이 발생했습니다. 이어서 미중 경쟁이 격화되면서 반도체는 전략 무기이자 압박 수단으로 변했습니다. 미국은 2022년 10월 7일 중국의 반도체 역량을 겨냥한 포괄적 수출 통제를 단행했습니다. 이 조치는 인공지능 학습에 필요한 고성능 반도체부터 첨단 제조 장비, 그리고 미국 국적 기술자의 기술 지원까지 막는 전방위적 통제였습니다. 단순한 무역 규제가 아니라, 중국의 첨단 반도체 산업 발전을 구조적으로 제한하려는 전략적 봉쇄였습니다.
미국은 동시에 자국 내 제조 부흥에도 나섰습니다. 칩스법(Chips and Science Act)은 반도체 공장 건설과 연구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에게 중국 내 투자를 제한하는 조건을 부과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보조금 정책이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지정학적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입니다. 유럽연합 역시 유럽 칩스법(European Chips Act)을 통해 2030년까지 역내 시장 점유율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일본과 한국도 각각의 보조금과 세제 지원을 통해 자국 내 제조 기반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반도체는 이제 세계 각국이 국가 전략 차원에서 다루는 안보재가 된 것입니다.
중국은 이러한 압박에 맞서 막대한 투자와 정책 동원으로 반도체 자립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첨단 장비와 소프트웨어에서 서방 국가들이 쥐고 있는 ‘병목 지점(bottleneck)’은 쉽게 극복되지 않습니다. ASML의 EUV 장비는 최첨단 칩 제조에 필수적이지만, 미국과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중국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차단했습니다. 일본 역시 일부 핵심 소재의 대중 수출을 통제하며 미국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은 아직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서는 제한된 성과만을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은 막대한 내수 시장을 무기로 성숙 공정(28나노 이상)에서 대규모 생산을 확대하고, 자국 수요를 자급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는 글로벌 분업 체제가 점차 ‘블록화’되는 흐름을 가속화합니다.
한국은 반도체 공급망 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 강국으로서 한국은 세계 공급망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지만, 동시에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미국은 칩스법을 통해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를 촉진하고 있고, 중국은 여전히 한국 반도체 수출의 최대 시장입니다. 한국 정부는 K-칩스 정책을 통해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을 확대하며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산업 육성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이 되었습니다. 반도체는 한국의 생존을 좌우하는 기술이자 안보 자산으로 격상된 것입니다.
반도체가 ‘21세기의 석유’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산업적 중요성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도체가 국제정치의 무기화된 상호의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반도체 기술의 병목을 활용해 중국을 압박하고, 중국은 거대한 내수와 희토류, 일부 원자재 통제를 통해 반격합니다. 네덜란드와 일본은 장비와 소재에서 전략적 지렛대를 쥐고 있으며, 한국과 대만은 제조 능력으로 세계 질서를 흔들 수 있는 카드가 됩니다. 각국이 반도체를 국가안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 이 산업은 앞으로도 지정학의 중심에 설 것입니다.
반도체는 기술이 곧 안보라는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자원입니다. 한 나라가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된다면, 군사력, 산업력, 경제력 모두에 치명적 손실을 입게 됩니다. 20세기 석유가 에너지 전쟁과 지정학적 질서를 규정했다면, 21세기 반도체는 디지털 전쟁과 기술 패권을 규정합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신념은 무너졌고, 국가는 다시 선수로 뛰어들었습니다.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은 앞으로 더 치열해질 것이며, 이는 단순한 산업 정책을 넘어 국제 질서의 근본을 재편하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