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가 바꾼 국제 정치의 풍경
20세기 석유가 산업화와 국제정치의 혈관이었다면, 21세기의 심장은 배터리입니다. 전기차, 재생에너지, 디지털 기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배터리는 단순한 부품을 넘어 국가와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부상했습니다. 에너지 전환과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인류 공동의 과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배터리는 그 핵심 기술로서 지정학적 경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전기차 확산은 배터리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미국, 유럽연합, 일본 등 주요 자동차 시장은 2035년을 전후해 내연기관 차량 판매를 단계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라 세계 자동차 산업의 구조 전환을 의미합니다. 내연기관의 핵심이 엔진이었다면, 전기차의 핵심은 배터리입니다. 따라서 배터리 공급망을 장악하지 못하면 자동차 강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도 생산이 간헐적이기 때문에, 전력을 저장할 수 있는 배터리가 없다면 확대가 불가능합니다. 배터리는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전력 산업의 미래까지 좌우합니다.
이 산업은 현재 한국, 중국, 일본이라는 세 축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일본의 파나소닉, 중국의 CATL(닝더시대)과 BYD가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점유율만으로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배터리 산업은 원자재에서 정제, 소재, 셀 제조, 완성품, 재활용까지 전 과정이 얽혀 있는 공급망 산업이며, 이 공급망이 국가안보의 논리와 맞물리면서 국가자본주의적 성격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특히 이 분야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했습니다. 리튬의 경우, 호주·칠레·아르헨티나 같은 주요 산지에서 생산되는 물량을 장기 계약으로 묶어 두었고, 코발트는 콩고민주공화국 광산에 대한 지분 투자로 지배력을 확대했습니다. 무엇보다 정제 단계에서 중국의 힘은 압도적입니다. 전 세계 리튬 정제의 약 60퍼센트, 코발트 정제의 약 70퍼센트 이상이 중국에서 이루어집니다. 정제를 거친 양극재·음극재 같은 중간재 역시 중국 기업들이 대부분 공급합니다. 셀 제조에서도 CATL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이며, 테슬라와 BMW, 현대자동차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에 배터리를 공급합니다. 중국은 원료 채굴부터 정제, 부품 생산, 셀 제조, 재활용까지 사실상 전 과정을 통제하는 수직적 공급망을 구축했습니다.
이에 맞서 미국과 유럽은 공급망 재편에 나섰습니다. 미국은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을 제정해 전기차 구매 보조금을 지급하되, 조건을 부여했습니다. 전기차는 북미에서 최종 조립되어야 하고, 배터리에 사용되는 핵심 광물은 미국이나 자유무역 협정을 맺은 우방국에서 채굴·정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중국산 배터리와 광물을 배제하는 조치였습니다. 유럽연합 역시 그린딜 산업계획과 넷제로 산업법을 발표하며, 역내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유치하고 아시아 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습니다. 독일, 프랑스, 스웨덴에는 ‘기가팩토리’라 불리는 초대형 배터리 생산 시설이 건설되고 있으며, 유럽 전역이 새로운 전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 거대한 재편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한국의 배터리 3사는 미국과 유럽 자동차 기업들과 합작해 현지 생산 거점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GM과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사인 얼티엄셀즈, SK온과 포드의 합작사 블루오벌SK, 삼성SDI와 스텔란티스의 합작사 스타플러스에너지는 모두 미국 현지에서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가장 큰 약점은 원자재 조달입니다. 리튬, 코발트, 니켈과 같은 핵심 광물의 정제는 여전히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미국 IRA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원자재 공급망 다변화에 적극 나서야 하는 상황입니다. 한국 정부도 해외 광산 투자, 자원외교, 재활용 기술 지원 등 다양한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단기간에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배터리 경쟁은 자원 지정학과 직결됩니다. 특정 자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언제든 무기화될 수 있습니다. 2010년 중국이 일본과의 갈등 속에서 희토류 수출을 중단했던 사례는 공급망 무기화의 전형이었습니다. 최근 중국이 갈륨과 저마늄의 수출을 제한하며 반도체와 광통신 공급망을 압박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리튬, 코발트, 니켈 역시 특정 국가나 기업이 지배하고 있어, 이러한 자원이 국제정치에서 전략적 카드로 사용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과 유럽은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즉 신뢰할 수 있는 우방국들과의 공급망 재편 전략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캐나다와 호주를 핵심 광물 파트너로 설정했고, 인도네시아와 남미의 리튬 삼각지대(칠레·아르헨티나·볼리비아)에도 적극 투자하고 있습니다. 유럽 역시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자원 협력을 확대하며 중국 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습니다.
기술 개발 경쟁도 치열합니다. 전고체 배터리(Solid-State Battery)는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가 높고 안전성이 뛰어나 ‘꿈의 배터리’로 불립니다. 일본과 한국, 미국, 중국 모두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를 위해 대규모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며, 어느 나라가 먼저 상용화에 성공하느냐가 차세대 패권을 좌우할 것입니다. 동시에 코발트 프리 배터리, 재활용 기술, 대체 소재 개발 등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배터리는 단순한 산업재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기후위기 대응, 지정학적 경쟁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입니다. 석유가 20세기 국제 질서를 규정했다면, 21세기의 질서는 배터리와 이를 둘러싼 자원 경쟁이 규정할 가능성이 큽니다. 자유시장 논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 전쟁터에서, 국가는 심판이 아니라 선수로 뛰어들고 있으며, 기업은 지정학을 고려하지 않고는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배터리는 에너지 전환의 전쟁터입니다. 총과 대포가 아니라 광물과 보조금, 기술과 외교로 치러지는 전쟁입니다. 누가 더 빠르게 자원을 확보하고, 누가 더 효율적인 기술을 상용화하며, 누가 더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을 구축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합니다. 반도체가 21세기의 석유라면, 배터리는 에너지 전환의 심장입니다. 이 심장을 누가 쥐느냐가 앞으로 세계 경제와 정치의 판도를 결정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