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강국이자 지정학의 최전선
한국은 지금 그 어느 나라보다도 기술과 안보의 경계에서 치열한 시험대에 서 있습니다. 반도체와 배터리, 통신과 조선, 철강과 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산업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이자, 동시에 미중 전략 경쟁의 최전선에 놓여 있는 국가입니다. 기술이 경제를 넘어 안보로 재정의되는 이 시대에, 한국은 단순히 수출 주도형 제조 강국이 아니라 ‘기술 안보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한국의 가장 큰 강점은 반도체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을 압도하며,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도체는 동시에 한국의 최대 약점이기도 합니다. 생산의 대부분이 해외 고객사와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어, 미중 갈등과 수출 통제, 보조금 경쟁 속에서 한국의 선택지는 좁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칩스법(Chips and Science Act)’을 통해 자국 내 투자를 유도하고, 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중국 내 생산 확대를 제한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미국 현지 투자를 확대하면서도 중국 시장의 비중을 쉽게 줄이지 못하는 난관에 부딪혀 있습니다. 한국이 어느 쪽에 기울든 전략적 비용은 막대합니다.
배터리 역시 비슷한 상황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은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선두권을 형성하며 미국, 유럽, 아시아 전역에 대규모 합작 공장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산업의 뿌리는 리튬, 코발트, 니켈 같은 광물에 있습니다. 이 자원의 정제와 중간재 생산은 중국이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어,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Inflation Reduction Act) 조건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급망 다변화에 나서고 있습니다. 광물 외교, 재활용 기술, 대체 소재 개발 같은 노력이 병행되고 있지만, 당분간은 중국 의존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은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면서도 자원의 지정학적 취약성을 관리해야 하는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데이터와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한국은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와 ICT(정보통신기술) 산업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 연구와 데이터 활용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압도적 격차에 가려져 있습니다. 동시에 미국은 동맹국과의 데이터 공유와 인공지능 규범 협력을 강조하고 있고, 중국은 한국을 자국의 디지털 실크로드 구상에 끌어들이려 합니다. 한국은 양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술 주권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시험대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은 단순히 산업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민감한 지역 중 하나에 있습니다. 북한의 위협,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 미중 갈등의 격화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기술 안보는 곧 국가 생존 전략의 핵심이 됩니다.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 같은 전략 산업은 단순한 경제 자산이 아니라 군사력, 외교력, 정치적 협상의 지렛대가 됩니다. 따라서 한국의 산업정책은 더 이상 경제부처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전략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한국은 이미 중요한 선택들을 시작했습니다. 2023년 이후 정부는 ‘K-칩스 전략’을 통해 반도체 세제 혜택을 강화했고, 2024년에는 대규모 금융·세제 지원 패키지를 발표했습니다. 배터리 산업을 위한 자원 외교도 본격화되었고, 데이터와 인공지능 규제 체계도 국제 협력과 조율 속에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습니다. 한국은 기술 안보 시대에 단순히 ‘따라가는 국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전략적 주도권을 갖춘 ‘설계자 국가’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결국 한국의 시험대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내부적 과제입니다. 교육, 연구개발, 인재 양성, 제도적 혁신 없이는 기술 주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외부적 과제입니다. 동맹과 파트너십을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부분에서 독자성을 유지하며, 어떤 영역에서는 공동의 규범을 주도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기술이 안보재로 변하고, 국가자본주의가 귀환한 시대에 한국은 피할 수 없는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시험은 단순히 경제성장률이나 무역 흑자를 넘어서, 국가의 생존과 미래를 결정짓는 문제입니다.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 데이터, 희토류라는 다섯 개의 전략 자산은 모두 한국에게 동시에 기회와 위기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한국이 이 시험대에서 성공적으로 답안을 작성한다면, 21세기 기술 안보 시대에 선도국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면, 외부 환경에 휘둘리는 취약한 경제로 전락할 위험도 존재합니다.
한국은 지금 기술 안보의 시험대에 서 있습니다. 그 시험은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한국이 이 시험에서 어떤 답을 내놓을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