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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새로운 영토

데이터는 21세기의 석유인가

by 드라이트리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가장 근본적인 자원은 더 이상 석유나 금속이 아니라 데이터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데이터는 21세기의 석유다”라는 표현은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널리 회자되지만, 실제로 데이터는 단순한 산업적 원재료를 넘어 국가 안보와 권력의 핵심 자산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데이터는 개인의 행동과 금융 거래, 군사 활동과 국가 인프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기록하고, 이를 분석하는 능력이 곧 권력의 새로운 형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데이터를 둘러싼 경쟁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영토 분할과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 강대국들이 땅을 점령하고 자원을 확보하려 했다면, 오늘날 국가는 데이터의 흐름을 통제하고, 저장 공간과 네트워크 경로를 지배하려 합니다. 클라우드 데이터 센터, 해저 광케이블, 통신 인프라, 위성 네트워크는 현대의 ‘영토’이자 ‘국경’입니다. 데이터를 장악한 국가는 정보의 흐름을 관리하고, 적대국을 차단하며, 자국 기업의 우위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데이터 제국을 구축했습니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같은 빅테크 기업들은 글로벌 인터넷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며, 클라우드 시장과 인공지능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 저장 능력에서도 압도적입니다. 아마존 웹 서비스(AWS)는 전 세계 클라우드 시장 점유율 1위이며,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인공지능 연구의 핵심 인프라를 제공합니다. 미국의 강점은 단순히 기업의 규모가 아니라, 데이터가 자유롭게 흘러가는 개방적 생태계를 유지하면서도 필요할 때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 Committee on Foreign Investment in the United States)는 외국 기업이 미국의 데이터 자산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차단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사이버 주권(Cyber Sovereignty)’이라는 개념 아래, 데이터는 국가의 영토와 같은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모든 인터넷 활동은 국가의 감시와 검열 하에 있으며, 개인정보 보호법과 데이터 보안법은 표면적으로는 규제지만 실제로는 국가가 데이터를 직접 통제하는 수단입니다. 예컨대 중국 내에서 생성된 데이터는 원칙적으로 해외 반출이 불가능하거나, 국가의 승인 없이는 외국 기업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중국은 거대한 내수 데이터 풀을 자국 기업과 군사·정부 연구에 독점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화웨이, 텐센트, 알리바바 같은 기업들은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해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기술을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전략적 목적에 종속됩니다.


유럽연합은 미국식 개방과 중국식 통제 사이에서 ‘데이터 규범의 강국’이라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 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입니다. GDPR은 개인정보 보호를 강력히 규제하면서도, 역내 데이터 이동의 기준을 설정했습니다. 최근에는 ‘데이터 거버넌스법’과 ‘인공지능법(AI Act)’을 통해 데이터 활용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의 전략은 데이터 자체에서 패권을 쥐기보다는 규범을 통해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하려는 것입니다.


데이터의 군사적 활용 역시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위성 영상, 무인기 정보, 사이버 보안 로그, 심지어 민간 소셜미디어 데이터까지 군사 전략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데이터가 어떻게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지 보여주었습니다. 민간 위성 기업이 제공한 이미지와 실시간 데이터 분석이 군사 작전에 직접 사용되었고, 사이버 공격과 방어 모두 데이터의 흐름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데이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전장의 지도를 그리는 무기이자 방패가 된 것입니다.


한국 역시 데이터 안보의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적인 정보통신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고,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하드웨어 강국이지만, 데이터 주권 측면에서는 아직 뚜렷한 전략을 확립하지 못했습니다. 클라우드 시장은 미국 기업이 장악하고 있으며, 개인정보 보호 규제는 엄격하지만 데이터 활용은 상대적으로 제약이 많습니다. 동시에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데이터 흐름을 어떻게 관리할지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미국은 동맹국들과의 데이터 공유와 협력을 강조하는 반면, 중국은 ‘사이버 안보 협력’을 내세워 영향력을 확대하려 합니다.


데이터를 둘러싼 갈등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것입니다. 데이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흐르는 경로는 특정 국가의 통신망과 클라우드 서버, 광케이블과 위성이라는 물리적 자원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는 전통적인 영토 분쟁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데이터는 새로운 영토이며, 이를 지배하는 자가 21세기 국제 질서를 주도할 것입니다.


데이터 경쟁은 단순히 기업의 혁신이나 시장 점유율 싸움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주권을 둘러싼 새로운 전쟁입니다. 미국은 개방과 기술 우위로, 중국은 통제와 내수 독점으로, 유럽은 규범과 법으로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중견국들은 이 가운데서 자신만의 전략적 위치를 찾아야 합니다. 데이터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흐름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새로운 국경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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