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칩 워(Chip War)로 보는 반도체와 안보의 상관관계
# 장면 1
2022년 10월, 미국 CIA 국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인민해방군에 2027년까지 대만 침공에 대한 준비를 마칠 것을 지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 2019년에 방영된 HBO 드라마 이어스앤이어스(Years and Years)의 마지막 장면처럼 중국은 대만을 공격하게 될 것인가?
#장면 2
2022년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으로 대표되는 미국 리쇼어링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한 권의 책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크리스 밀러(Chris Miller)의 칩 워(Chip War)였다. 러시아 경제사를 연구하다가 어떻게 반도체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국제질서의 변화
한반도 지도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대만과 한국, 일본이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지리적으로 막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는 미국과 중국이 물밑에서 경쟁하는 양상이었다면,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를 거치며 중국에 대한 견제가 노골화되었다. 이제 첨단 기술은 안보재가 되었고, 미국은 중국에 대해 전방위적 압박과 견제를 가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이제 더이상 2차대전 후와 같이 초강대국(1강)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빠르게 경제적, 군사적 추격을 이어오고 있고, 미국은 20~21세기 동안 몇 차례의 정치적, 경제적 이벤트를 거치면서, 더 이상 예전처럼 전 세계에 미국의 자원을 전적으로 투사하지 않는다. 다만, 영국과 유럽, 일본, 호주, 한국 등 동맹국들을 통해 자신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유지하고자 하고 있다.
왜 대만인가?
다시 책 칩 워(Chip War)로 돌아와보자. 저자인 크리스 밀러는 미국 터프츠 대학교(Tufts University)의 교수이다. 이 책을 보면 워싱턴이 생각하는 중국과 대만, 한국에 대한 인식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결국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만은 안보적으로 미국에게 마치 항공모함같이 중요한 존재인데, 중국은 대만과 통일하려는 정치적, 군사적 결심을 세워가는 중이다. 그런데 경제적 관점에서도 미국에게 대만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TSMC가 대만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TSMC가 문제가 되는가? 미국은 반도체 산업을 20세기에 일궈낸 종주국(?) 같은 국가이다. 인텔과 무어의 법칙은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상징하는 두 단어이다. 하지만 글로벌 공급망 분업을 통해 미국은 현재 반도체 설계를 주로 전담하고, 파운드리(위탁 생산)는 대만 TSMC를 통해 충당하는 실정이다.
애플과 엔비디아, 퀄컴과 같은 미국 회사들은 전 세계에서 칩을 가장 많이 쓰는 기업 중 하나이다. 이제 더 이상 스마트폰과 GPU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들이 모두 TSMC의 주요 고객이다. 삼성 역시 파운드리 2인자이지만, TSMC는 삼성보다 2배 이상 압도적으로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이 높다.
정리해보면, 대만은 미국에게 중국 견제에 중요한 지정학적 의미를 가진 땅인데,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TSMC는 미국에게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그런데 중국이 대만을 노리고 있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TSMC의 생산설비를 모두 갖게 된다면, 미국은 반도체 수급에서 큰 차질을 보이게 될 것이다. 또는 중국이 대만에 있는 TSMC 공장을 폭격하면,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반도체 수급에서 큰 차질을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칩(Chip)은 왜 중요한가?
책 칩 워(Chip War)에서는 반도체가 단순히 수많은 전자기기에 탑재되기에 중요한 점도 있지만, 안보적으로 미사일과 같은 무기 체계에 탑재되기에 더욱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저자인 크리스 밀러는 본래 러시아 경제사를 연구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왜 칩을 살펴보게 되었을까? 소련이 미국에 밀리게 된 여러 이유가 있지만, 크리스 밀러는 반도체 산업에서 밀렸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아울러 칩셋에 대한 중요성은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더욱 주목받았다. 5G 기술이 출시되면서 다양한 통신장비 및 서버 장비에 대한 니즈가 생겨났는데, 이때 중국 화웨이에서 저렴한 원가를 무기로 하여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호주 등 파이브 아이즈는 백도어, 해킹 등 정보보안 우려를 이유로 중국산 장비를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과로 칩셋이 정보와 방첩 등 안보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22년부터 칩4(Chip 4) 동맹을 통해 미국, 일본, 대만, 한국 4자 간의 반도체 동맹을 만들고자 공을 들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제 워싱턴 선언 이후 한-미-일 공조가 강화되며 더욱 본격화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국의 설계, 한국의 메모리, 대만의 파운드리, 일본의 소재장비가 합쳐지면 공급망 가치사슬에 있어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은 왜?
책 칩 워(Chip War)를 보면 미국이 반도체와 대만, 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책 앞 부분에는 반도체 관련 주요 용어에 대한 설명을 해두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Morris Chang)은 있지만, 삼성 이병철은 없다. 왜 그런걸까? 미국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인 것일까? 미국 입장에서는 애플과 엔비디아와 같은 미국 기업들의 칩을 대량 생산하는 대만 TSMC가 보다 우선 순위에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TSMC가 미국 애리조나주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 것과 같이 미국 내에서도 안전하게 칩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한 것이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지만,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전적으로 우리가 미국에 의지할 상황은 아니다. 따라서 보다 영민하게 우리의 국익을 정의하고 세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때에 따라 밀당도 하고, 여러 옵션도 협상 카드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현재 한국은 여러가지 반도체 산업 이권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중국에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 설비를 업그레이드하는데 제약이 있고, 미국 마이크론가 중국 시장에서 빠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그 시장을 먹지 못하게 압박하고 있으며, 미국에 공장을 지어주는 것도 모자라 영업 비밀 정보까지 요구하고 있어 이에 대한 방어가 필요한 상황이다.
미국과 일본, 한국이 협력한다면, 반도체 생태계에 있어 안정적인 벨류체인과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은 한국의 국익이 보다 미국의 반도체법 가이드라인에 잘 녹아들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도 협력 분위기 속에서 양국간 채널이 가동되고 있다. 향후에는 한국이 미국에 적극적인 투자를 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안보적 또는 기술적 반대급부들을 얻어내는 노력을 앞으로도 쭉 이어갈 필요가 있다. 워싱턴에서는 칩스법으로 중국을 견제하여 한국이 반사이익을 이미 보았다는 입장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한국이 미국에 대규모로 투자한 것에 대한 추가적인 이득을 거두고, 잠재적인 리스크들을 줄여나가는 생존전략이 요구되는 때이다. 반도체와 한국 그리고 안보의 삼각함수는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