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책을 좋아해서 온라인 중고 서점을 주로 찾아보는 편이다. 중고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익은 책에서 나는 냄새가 좋고 간혹 줄이 쳐진 부분이나 낙서가 있는 경우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책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공유할 수 있어서다.
그래서 무릎 연골 수술로 병원에 누워 할 만한 게 없었을 때도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중고책을 여러 권 구매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문한 책 택배박스를 열어보니 책 사이에서 엽서 한 장을 발견하였는데, <이성복 아포리즘>이란 책이 좋아 일전에 친구에게 선물하여 내가 읽을 용으로 재구매한 책의 한 페이지에 줄이 쳐져 있어 그에 대한 사과와 책 한 권을 같이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엽서에 궁서체로 휘갈겨 써진 짤막한 글귀를 읽으니 기분이 좋았다.모른 척 지나가도 큰 문제없을 정도이지만 최상의 상태로 배송해주기로 했던 점이 걸려 양해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 중고책에 대한 발송자의 엽서 -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받은 배려에 괜스레 마음이 찡해지면서 그 누군가의 마음에 쏙 들어 줄을 칠 수밖에 없었던 '이성복 아포리즘 284 Page'를 찾아봤더니 정갈하게 자로 댄 듯 빨간 색연필로 줄이 쳐져 있었다.
" 만약 네가 '너'를 버리지 않는다면 너의 한 평생은 슬픔과 좌절의 연속일 것이다.'너'는 너 자신의 환영일 뿐이다. 지금까지 네 실패의 원인은 환영을 실체로 잘못 안 데 있다. 자, 너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슬픔인가, 평정인가? 좌절인가, 겸허인가?"
- 이성복 아포리즘(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문학동네), 284p -
나는 꽤 오랜 기간 경영 컨설팅에 종사했었다. 경영 컨설팅은 회사의 전략, 인사제도, 교육 등 다양한 경영분야에 대해 문제점을 진단하여 개선방안을 제시하는 일로 이 일을 7년 넘게 해왔지만 사회적으로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원했던 나에게 맞는 일인지 늘 고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회사의 필요에 의해 일방적으로 써야 하는 철학 없는 컨설팅 보고서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2~3년간은 무기력에 빠져 지냈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고소득 전문직의 삶 또한 포기하기 쉽지 않았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금액을 생활비로 넉넉하게 드릴 수 있었고 '올리브영'에서 가격을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물질적 여유가 좋았다. 또 컨설턴트로써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하니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있는 '느낌'이 주는 만족감이 좋았다. 실제 내 마음이 진정 원하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남들에게 멋있게 보이는 삶을 버릴 수 없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에서 인정하는 삶과 내 마음이 원하는 삶에 대한 열망 사이의 간극은 더 벌어지며 심리적 균형이 무너져 버렸고, 남동생이 입대 3일 만에 적응장애로 다시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나는 더 이상 현실을 버틸 힘이 없어 확정된 것 하나 없이 이제는 내 마음 가는 대로 삶을 살겠노라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러나누적되었던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는지 갑작스러운 공황 발작으로 응급실에 실려갔고 열흘 뒤에는 무릎까지 수술 받게 되면서 나는 과거-현재-미래 그리고 주변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단절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누가 언제 마음에 와 닿았는지 알 수 없는 중고책의 문구 한줄이 우연히 찾아와 나를 위로하였다.
사실 세상은 모든 게 연결되어 있어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이제는 환영의 '나'를 쫓지 말고 네가 원하는 실체의 '나'를 택하라고 말한다. 나를 버리지 않으면 나를 찾을 수 없고 원하지 않은 삶은 늘 슬픔과 좌절만 줄 것이기에 나를 버리고 나를 찾으라고 한다.
중고책은 나에게 우연을 가장하여 타인과의 세계로 연결해주는 실체이자 겸허함과 평정을 주는 힘의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