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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밤이 Nov 16. 2020

20년이 담긴 공간이 사라진다는 건

화곡 타운 베이비의 굿바이 나의 힐타운

- 나의 20년이 담긴 빌라, 화곡동 힐타운 -

 약 20년을 살아온 '30년식 화곡동 힐타운'이 허물어지기로 결정됐다. 몇 년 전부터 물이 새기 시작하여 방수처리를 몇 번이나 했지만 오래된 빌라의 균열 사이를 매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이태원에서 만 두 돌을 보내고 세 살 때 이사 온 화곡동.화곡동에서 살아온 30년의 세월 중 약 20년을 살았던 힐타운이 사라진다고 하니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래된 주택과 빌라들의 빨간 벽돌들
어느 집 된장 끓이나 보다 하고 지나다니던 골목
오후 어스름한 노을과 조잘거리며 집에 들어가는 아이들
떡볶이 한 컵 들고 높은 언덕 땀 뻘뻘 흘리며 집으로 향하던 어린 나
부업거리를 손수레에 싣고 힘겹게 끌고 올라오던 엄마


 힐타운은 내가 30년간 살아온 화곡동의 집 중에서 제일 낮은 언덕에 위치한 집이었다. 봉제산 자락 근처 산속 뻐꾸기 소리가 들렸던 주인집의 1층 집에서 2층 놀이터가 앞에 있던 삼호빌라를 거쳐 힐타운까지 조금씩 언덕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사를 했는데, 삼호빌라로 이사할 때는 이삿짐센터를 부르지 않고 직접 이사를 하느라 언니랑 의자에 덜덜거리며 이삿짐을 실어 나르던 일이 재미있던 추억으로 남았다.

산 자락의 높은 언덕에서도 롤러를 자유자재로 타고 다니던 나와 언니. 언니와 신나게 롤러를 타다가 그 당시 몰려다니던 떠돌이 개 무리에 쫓겼을 때 무서운 나머지 언니가 주택 대문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대문을 잠가 주택의 돌담 벽에 언니가 울면서대롱대롱 매달렸던 일은 결혼하면서 화곡동을 벗어난 언니의 트라우마로 아직 회자되고 있다.


 이사 간 집은 여전히 화곡동이다. 새로운 집은 온전히 평지에 있어 높은 언덕을 다니느라 연골이 하나도 없는 엄마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이며 나 또한 집이 꽤 마음에 들지만 나의 20여 년의 희로애락이 담긴 힐타운의 삶을 쉽사리 잊기는 어려울 것이다.

힐타운으로 이사 오자 마자 몇 개월 뒤 언니는 졸업식 날 엄마랑 시장을 가다가 쓰러져 희귀병을 진단받았다. 이후 엄마의 온 신경은 언니의 병원 생활이었고 아빠는 어린 동생과 나를 챙기기보다 술 한잔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잊으려 했다. 이로 인해 동생은 애정결핍과 학교폭력에 시달렸고, 나는 마치 전쟁에서 혼자 살아남은 사람처럼 내가 가진 것은 '나' 밖에 없으니 나라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기보다 더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한 채찍질을 했다. 그러나 언니의 결혼, 나의 대학 합격과 취업, 승진을 거치며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성취를 맛보던 곳도 힐타운이었다.


 이삿짐을 치우고 나니 눈에 보이지 않았던 곰팡이가 잔뜩 피어있는 방을 보고 이런 집에서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 엄마, 이 말속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힐타운에서 많이 힘들었지, 엄마가 미안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곰팡이는 이사를 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 눈에 보였다. 힐타운에서 곰팡이 처럼 피어올랐던 마음 한 구석의 슬픔은 떠나야만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뜨거운 눈물 삼키던 힐타운을 떠나보낸다.


Goodbye, 나의 힐타운, 우리의 슬픔

Goodmorning,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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