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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Oct 27. 2018

내가 콜센터에서 얻은 것

블로그와 브런치에 콜센터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방문자가 적잖이 늘었다. 유입경로를 확인해보면 '콜센터 업무', '고객센터 진상', '상담원 월급' 같은 단어를 검색해 찾아오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콜센터 입사를 고민하는 분들일 것이다. 가끔은 그런 분들이 댓글을 남겨주기도 한다. 자신의 상황과 성격을 말씀하면서 콜센터 입사를 추천하는지, 콜센터 일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은지를 여쭤보신다.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걱정이 됐다. 콜센터에 5년을 다녔지만 다른 콜센터의 상황은 잘 알지 못할뿐더러 내가 뭐라고 타인의 삶에 훈수 둘 자격이 있을까 싶어 졌다. 댓글을 남기신 분들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내게 대단한 답변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도 솔직한 나의 생각을 전하고 싶어서 고민을 해보지만, 매번 비슷한 답을 하게 된다. '평생직장이나 오래 다닐 일로는 추천하지 않지만, 삶에서 한 번쯤은 경험해도 나쁘지 않다'라고.

더 떨어질 정도 없을 만큼 지긋지긋해져 버린 콜센터를 나는 왜 권하는 것일까. 대학 시절 무섭기로 소문난 전공 교수님이 '혼자서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까먹으며 견디는 시간이 있어야 진짜 사람이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경험을 통해 삶에 깊이가 생긴다는 의미였다. 끔찍이 싫어했던 교수님의 그 말이 이상하게도 10년이 넘도록 또렷하게 남아있다. 꼰대 교수의 흔해빠진 개똥철학일 수도 있지만, 지난 5년의 콜센터 생활 동안 그 말은 나의 버팀목이었다. 내 인생 망했구나 싶고 나 자신이 한없이 미워질 때마다 '나는 지금 동굴에서 사람이 되기를 견디고 있는 시간이다'라고 위로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힘든 순간에 매달리게 되는 한 구절의 글, 한마디의 말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동굴을 견뎌내고 진짜 사람이 되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지금도 동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이제는 내가 동굴 자체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도 든다. 한계에 다다른듯한 마음과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더해져 올해 말로 퇴사를 결정했는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덜컥 회사를 그만뒀다가 직장을 구하지 못해 또 콜센터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콜센터 5년 다니면서 내가 아주 망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하나는 얻었다. 결국 동굴은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믿음, 내가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직장을 옮길수록 계속 이전의 회사보다 좋지 못한 곳으로만 흘러가더니 콜센터까지 오게 됐다. 뭘 해도 악착같지 못한 내가 이렇게 망하는구나 싶었다. 진상을 대하는 것은 힘들었고, 회사가 나를 부품 취급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힘들었다. 매일 침대에서 눈뜨자마자 출근하기 싫다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월세에 카드값 걱정에 꾸역꾸역 출근길 지하철에 올랐다. 그러길 몇 년, 나는 약간 찌그러졌는지는 몰라도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욕을 먹어 번 돈이지만 먹고 싶은 걸 먹고 사고 싶은 걸 산다. 큰돈을 벌진 못해도 남에게 폐 끼치며 살진 않는다. 내가 꿈꾸던 미래와 생판 다른 모습이지만 어떻게든 살아지긴 한다.


삶이라는 게 얄궂다는 생각이 든다. 34년이나 산 것 같으면서도 34년밖에 살지 않은 것 같다.


어쩔 때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면 지금보다 더 망하기도 힘들겠다며 어디 한번 해보라는 오기가 발동한다. 남들은 3개월도 힘들다는 콜센터를 5년 동안 버텼는데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긴다. 콜센터보다 나은 일을 할 수 있는 이들에게 굳이 해보라고 추천하지는 않지만, 도저히 못 할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진상 고객을 만나 일주일 만에 도망치는 사람, 잘 버텨 1년을 채우고 나가는 사람, 나처럼 지겹게 5년을 다니는 사람 모두 콜센터 일에서 느끼는 바가 있을 거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내가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가장 낮은 일터에서만 보이는 세상이 있다.

지난 5년이 내 삶의 공백 같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아무것도 발전하지 못한 채 허비해버린 아까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마다 한심한 내가 미워져 발을 콱 밟아버리고 싶어 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온 시간 속에서 무엇을 찾고, 어떤 것을 느끼는지는 나의 몫인 것 같다. 의미 없는 시간이라고 느끼면 정말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고, 아주 작은 의미라도 찾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얻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결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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