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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Nov 13. 2018

콜센터의 연말

어느 기업이나 바쁘고 한가한 시기가 있다. 은행은 공과금과 세금 납부로 인해 월말이 바쁘고, 항공사는 당연하듯 여름휴가철과 설, 추석 연휴가 성수기다. 콜센터도 마찬가지다. 5년쯤 다녀보니 콜센터가 돌아가는 사이클이 보인다. 내가 다니는 공연 티켓을 판매하는 콜센터는 3~4월은 조용한 시기다. 날 좋은 5월이 되면 야외 페스티벌 공연이 열리고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타겟으로 한 공연들이 많아져 콜이 늘어난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어린이 공연으로 젊은 어머니, 아버지들의 문의가 줄을 선다. 선선한 초가을에는 다시 야외 페스티벌 공연 때문에 분주해진다. 콜센터가 바쁘다 못해 전쟁터가 되는 시기가 있는데 바로 연말이다. 

공연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절로 공연 생각이 나는 시기가 연말이 아닐까.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들뜬 관객들의 마음을 이끄는 가수들의 콘서트가 수도 없이 오픈된다. 기업에서는 연말 행사로 공연의 단체관람을 하는 경우도 많아 연극, 뮤지컬의 단체 예매 문의도 부쩍 는다. 뭐니 뭐니 해도 크리스마스이브, 크리스마스가 성수기 중의 최고 성수기다. 할인이 수도 없이 많은 대학로 연극들도 대목인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정가로만 티켓을 판매한다. 


여기 콜센터에 다닌 이후로 크리스마스는 그냥 빨리 지나갔으면 좋은 날이 되었다.


공연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략 공연일 2~3개월 전부터 티켓 예매가 오픈되면서 바빠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매진되는 인기 가수의 콘서트를 관람하기 위한 고객들의 예매 전쟁이 시작된다. 다만 좌석은 한정되어 있고 좋은 자리를 예매하려는 고객은 많아 불가피하게 생기는 문제가 있다. 티켓이 오픈되는 당일이나 다음 날에는 예매 오류, 서버 과부하에 대한 항의가 빗발친다. 좌석 선택 후 결제 단계에서 오류가 생겨서 다시 들어가 보니 좌석이 없었다는 고객, 카드결제 시스템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라는 메시지가 떠서 10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다는 고객, 예매하는데 서버가 다운되고 접속이 느려졌다는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들의 민원이 쏟아진다. 

티켓 오픈 후 예매가 어느 정도 된 후에는 '변경'을 원하는 고객의 문의가 밀려든다. 예매한 이후에 더 좋은 자리가 나와서 좌석을 변경하려는 고객, 무통장 입금으로 예매했는데 카드 결제로 변경을 원하는 고객, 할인을 잘못 선택하여 할인 변경을 요청하는 고객들의 문의가 많다. 대부분의 변경은 불가해서 취소하고 다시 예매해야 하고, 취소 시 수수료가 부과된다는 안내를 하면 벌컥 화를 내거나 심하게 민원을 거는 고객도 있다. 

변경 문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배송으로 난리가 난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게 배송 문의인데 잔뜩 화가 난 채로 연락을 주시는 고객이 많아 응대가 쉽지 않다. 내가 생각해도 죄송스러운 상황이 있지만, 인내심 없는 고객들이 상담원을 다그치는 경우도 많다. 신용카드처럼 인편으로 배송되는 상품이라 배송이 출발한 이후 배송받기까지 영업일 기준 4~5일 소요되는데, 배송 시작 후 2~3일도 되지 않아서 '내 친구는 받았다는데 제 티켓은 왜 배송이 안 되죠?', '팬카페에서 보니 훨씬 먼 지방에 사는 사람도 받았는데 내 티켓이 안 오는 건 잘못된 것 아닌가요?' 같은 문의를 하며 빨리 배송해달라고 상담원을 다그친다. 고객이 주소를 잘못 입력했거나 연락이 되지 않아 반송된 건인데도 생트집을 쓰면서 배송비를 환불해놓거나 당장 재배송을 해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사람도 있다. 


배송 관련한 민원을 받으면서 티켓 배송을 하는 분들의 노고를 알게 된다.


배송이 다 되면 슬슬 취소 문의가 생긴다. 수많은 이유(갑자기 몸이 아파서, 회사 출장 스케줄이 생겨서, 애인하고 헤어졌다며, 휴가 때 공연을 보려 했던 군인이 휴가를 잘렸다고)들로 취소를 요청한다. 배송받은 티켓을 반송해야 하고 수수료는 반송처에 도착하는 날짜 기준으로 부과됨을 안내해 드리면, 수수료와 관련된 민원이 또 생긴다.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못 가는 건데 왜 수수료를 받느냐는 식부터 나는 예매할 때 수수료는 보지도 못했다고 우기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일행 중 일부가 못 가게 되어 일부만 취소를 원하는데, 결제수단이나 할인에 따라 부분 취소가 안 되는 경우도 있어서 일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공연 전날이나 공연 당일에는 다급한 문의가 들어온다. 티켓을 잃어버렸거나, 고향 집에 놓고 서울로 왔다는 고객, 취소 마감시간이 지났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취소해달라고 요청하는 고객이 많다. 안타깝고 도와드리고 싶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의가 대부분이다. 


티켓을 분실해서 소중한 사람과의 공연 약속을 망치게 되어버리는 고객의 마음은 어떨까. 티켓은 꼭 잘 챙겨야 한다.


요즘은 연말 공연의 티켓이 하나씩 오픈되고 있는 시기다. 인터넷에 익숙지 않은 어르신들의 전화예매가 부쩍 늘었다. 가보지도 않은 공연장의 좌석을 배치도만 보고 예매해드리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도 최대한 무대 앞, 중앙에 가까우면서 동시에 저렴한 좌석을 원하는 고객에게는. 아무리 전화를 받아도 콜 뷰에 떠 있는 대기호가 줄지 않아 의욕이 안 난다. 분명 고객은 바뀌었는데 문의는 똑같고,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내가 마치 자동응답기가 된 것만 같다. 크리스마스까지 1달 반쯤 남았다. 그사이에 생길 수많은 문의와 민원에 겁이 난다. 5년간 어떻게 연말을 이겨냈는지 끔찍스럽다가도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위안이 된다. 달력에 X표를 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지워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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