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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Oct 26. 2018

고객님, 조금만 매너 있게는 어려우실까요?

콜센터에 다니기 전 공항에서 일한 적이 있다. 항공사의 용역업체 소속으로 체크인 카운터, 게이트, 출발 및 도착에서 고객 안내를 했다. 서비스직이라 진상 고객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고객은 예상보다는 훨씬 적었다. 물론 항공기 결항 및 지연, 추가 수하물 비용, 캐리어 오도착 및 파손 등의 문제 상황이 발생하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고객은 드물었다.

콜센터도 공항과 마찬가지로 악성 고객은 많지 않다. 다만, 조금만 예의를 지켜줬으면 하는 고객은 공항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많다. 고객센터에 전화하는 분들은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목소리로만 소통한다는 점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전화는 개인적인 공간에서 하는 경우가 많고, 직접 만나는 것보다 자신이 덜 노출되기 때문에 남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좀 더 편하게 감정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항에서는 눈앞에 직원이 실재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상담원은 상담원의 얼굴이나 표정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감정을 가진 인간보다는 기업의 일부분으로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과연 나는 매너 있는 사람일까? 나이가 들수록 사람 간의 예의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상담을 해오면서 악성 고객은 아니지만, 조금만 자제해주시거나 고쳐주시면 좋을 고객의 통화 유형을 써보려 한다. 
  

1. 껌, 음식물을 씹으면서 말하는 고객 

껌을 짝짝 씹으면서, 사탕을 입에 굴리면서, 밥을 먹으면서, 음료를 마시며 전화를 하는 고객이 있다. 상담원은 전화를 받을 때 혹시라도 나의 말투에 고객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까, 발음이 잘못 나와서 전하려는 내용이 잘못 전달되지 않을까 하며 걱정하며 통화를 하는데, 전화기 너머의 고객은 상담원에게는 기본적인 전화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느껴져 조금 서운할 때가 있다. 아주 기분이 나쁜 건 아니지만, 썩 유쾌하지도 않다.  



2. 주위가 매우 시끄러운 곳에서 통화하는 고객 

요새는 이어폰이나 스피커폰, 차 안에서 블루투스를 이용해서 통화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고객의 말이 또렷이 들리지 않을 때가 꽤 있다. 의사소통만 되면 문제없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 정도는 괜찮지만, 통화가 어려울 정도로 심한 소음이 있는 곳에서 연락을 주시는 경우도 가끔 있다. TV나 음악을 매우 크게 틀어놓거나, 사람이 아주 많은 곳에서 전화해서 고객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면 무척 힘들다. 상담원은 고객 문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고 틀린 안내를 하면 안 된다. 고객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아 문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 계속 되묻게 되고, 내가 드리는 안내를 고객이 잘 듣지 못해 몇 번을 다시 반복해서 말하는 경우가 생긴다. 조용한 곳으로 한참 이동해서 전화를 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TV나 음악 소리처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소음은 줄여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3. 다른 일을 하며 전화를 하는 고객 

옆에 있는 친구나 직장 동료와 그다지 급해 보이지 않는 대화를 하면서 콜센터로 전화를 하는 고객이 있다. 내가 안내를 드리는 중에도 계속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는 통에 상담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자꾸 다시 말해달라고 한다. 통화를 하고 있으면 상담원인 나에게 하는 말인지, 옆에 있는 지인에게 하는 말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이 상담원과 통화 중에 갑자기 방문한 손님을 응대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정말 급한 일이 아니라면 통화에만 집중해주셨으면 좋겠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바빠서 그런 걸까. 고객도 나도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4. 자신의 정보를 너무 빠르게 말하는 고객

콜센터에서는 고객에게 정보를 확인해야 할 일이 많다. 예약번호나 휴대폰 번호, 계좌번호나 카드번호를 여쭤보면 숨도 안 쉬고 빨리 부르시는 고객이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게 아니라, 고객이 불러준 정보를 받아 적어 전산에서 조회해야 하는데, 받아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말씀하시면 다시 여쭤볼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일에 익숙해져서 예약번호나 휴대폰 번호 정도는 빨리 말해도 들을 수 있지만, 계좌번호, 배송지 주소를 너무 빠른 속도로 말씀하시는 분은 받아 적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참 갑갑하다. "다시 한번 천천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라고 부탁드리면 대부분 천천히 불러주시긴 한다. 다만 일부 고객은 이미 단단히 화가 나 있거나 민원을 걸 작정으로 일부러 빨리 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말이 빠른 고객이 인입되면 혹시 민원고객이 아닐까 긴장이 된다. 까칠한 고객은 상담원이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면 "사람 짜증 나게 몇 번을 말해야 해요? 정신은 어디다 팔고 일하는 거예요?"라며 화를 내기도 한다. 내가 일하는 고객센터는 클래식이나 발레 공연도 판매한다. 난생 들어본 적 없는 외국의 지휘자나 연주자, 발레단이나 무용수의 긴 이름이 들어간 공연명을 빠르게 부르고 나서 상담원이 알아듣지 못하면, "상담원이 그것도 몰라? 어떻게 그걸 몰라?"라며 무안을 주는 고객도 가끔 있다.  


5. 여러 명이서 전화를 돌려가며 통화하는 고객

여러 명이 함께 계신 상태에서 문의하거나 전화예매를 하는 고객들이 있다. 상담원이 안내를 하면 그에 대해 서로 상의를 하고 다시 통화를 이어나간다. 그 정도는 괜찮은데 한 분이 말씀하시고 있다가 "아휴 난 잘 이해가 안 되네. 네가 받아봐라"라며 난데없이 다른 사람을 바꿔준다거나, "답답하네! 내가 통화할게. 전화 이리 줘봐!"라며 전화를 뺏어가는 경우가 있다. 상담원이야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된다지만은 이미 했던 안내를 반복해서 해야 하고, 전화를 받는 고객에 따라 말씀하시는 내용도 다르고 원하는 바도 달라 응대하기 난감할 때가 있다.  


6. 상담원이 드릴 수 없는 답변을 요구하는 고객

"데이트할 때 볼만한 연극 추천해주세요~", "50대 아줌마, 아저씨들인데 무슨 공연이 재밌어요?", "OOO 지역에 무슨 콘서트 하나요?" 이런 문의를 하는 고객이 있다. 홈페이지에서 판매하는 공연이 몇천 개는 되고, 지역별 공연도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문의에는 "저희도 모든 공연을 관람해본 것이 아니라 공연을 추천해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OOO 지역에서 하는 공연이 너무 많아서 모두 안내해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공연명을 말씀해주시면 그에 관한 안내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알아듣는 고객이 많다. 하지만 일부 고객은 끝까지 "아이고, 그래도 나보단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추천 좀 해봐요", "내가 나이가 많아서 인터넷을 못한다니까~ 젊은 사람이 좀 찾아줘~"라며 답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상담원 개인의 의견을 말씀드릴 수도 없고, 만약 추천을 드려서 추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문의할 공연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고 연락을 주시면 좋을듯하다.


인터넷을 할 줄 모르는 어르신들은 공연에 관한 정보를 얻기가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7.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고객

대부분 전화예매를 할 때 많은 유형이다. 남아있는 좌석, 좋은 좌석 위치, 받을 수 있는 할인에 대해서는 끝없이 물어보고 또 물어본다. 상담원의 말을 잘 믿지도 않아 통화가 굉장히 길어지는데 예매를 완료하면 태도가 바뀐다. 상담원이 예매를 완료하고 난 후 필수적으로 안내해야 하는 사항이 많다. 예매한 내역을 확인해드려야 하고 취소수수료 및 취소 마감기한, 공연 관람 유의사항에 대해서도 2~3분 정도 안내를 드려야 한다. 필수 안내가 시작되면 10분 동안 묻고 또 묻던 고객은 갑자기 바빠진다. "아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안 들으면 안 돼요?", "통화비 내줄 것도 아니면서 참 길게도 말하네!" 상담원도 원해서 하는 안내가 아니다. 필수 안내를 하지 않으면 추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본인이 원하는 내용을 문의할 때는 천천히 오래 물어봐 놓고, 예매를 마치고 난 후에는 고작 2~3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상담원을 잡상인 취급하는 고객이 조금 밉다.


8. 반말하는 고객

성희롱이나 욕설을 하는 고객에게는 상담원이 먼저 통화를 종료할 수 있지만, 반말에 관한 응대 규정은 없다. 일부 상담원은 반말은 삼가 달라는 말씀을 드리기도 하지만 나는 웬만하면 듣고 있는 편이다. 6~70대 어르신이 반말을 하면 그러려니 하는데,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어린 고객이 반말을 하면 기분이 상할 때가 많다. 꾸준한 반말도 기분 나쁘지만, 은근히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하는 경우가 더 기분 나쁠 때도 있다. "XX를 예매했는데요, OO인 거 맞지? 그치?"라며 자유자재로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고객이 있는데 묘하게 기분이 상한다.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원래 그 사람의 언어습관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9. 말을 밉게 하는 고객

심한 막말은 아니라도 말을 참 못되게 하는 고객이 있다. 자신이 갑이고 상담원은 을이라는 위치의 차이를 명확히 알고 있는 고객이다. "뭐라고요?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보고 말을 하세요", "고객 돈을 처먹었으면 일을 똑바로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같은 말도 어찌나 밉게 잘하는지. 어떻게 하면 상담원 기분을 상하게 할지 잘 아는 사람 같다. 이런 말이 진상 고객에게 듣는 폭언보다 더 기분 나쁘게 들릴 때가 있다. 진상 고객은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똥 밟았거니 넘어가는데, 이런 고객은 상담원의 위치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 같아 슬퍼진다.

 

상담원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나서 그들이 얻는 감정은 뭘까. 뿌듯함? 성취감? 혹시 미안함이나 죄책감?



이 글을 쓰지 말아야 하나 많이 고민했다. 글을 읽으신 분들이 '상담원 눈치 보여서 전화하겠냐', '이런저런 고객이 다 싫으면 그만두지 왜 상담원 일을 하고 있냐'라고 느끼실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이 글은 고객에게 통화 매너를 고쳐주길 바라며 썼다기보다는 고객센터 일을 해봤거나 서비스업에 근무했던 이들과 공감을 하기 위해 쓴 글이다. 고객센터에서 일하기로 한 이상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다. 편한 고객만 상대할 수는 없다는 걸 안다. 지친 상담원의 넋두리 정도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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