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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Oct 24. 2018

오늘 내가 화난 이유

나는 전화는 많이 못 받아도 실수는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일한다. 그래서인지 꼼꼼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실수도 드물다. 그런 내가 오늘 고객에게 두 번이나 크게 혼났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내 잘못 때문이었다. 팬클럽 물품을 배송받지 못했는데 배송 조회를 해보면 배송 완료라고 되어있어 인입된 고객이었다. 예매내역을 살펴보니 배송 주소에 아파트 동호수를 입력하지 않은 게 보였다. 일반적인 공연 티켓이라면 당연히 배송업체로 확인을 해드렸을 테지만, 고객이 구매한 건은 팬클럽 물품이 배송되는 이례적인 상품이라 우리 회사와 계약된 인편 배송 업체가 아닌 일반 택배사를 통해 배송된 건이었다. 내가 배송확인을 하려 해도 배송업체 고객센터나 배송기사에게 연락을 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동호수를 제대로 입력하지 않은 고객의 잘못도 있고, 내가 물어보든 고객이 물어보든 배송기사의 답은 같을 텐데 고객이 직접 확인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이 들었다. 고객에게 주소를 제대로 입력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며 상세한 배송 문의는 배송업체나 배송 기사에게 하라고 안내했다. 고객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역정을 냈다. 주소를 제대로 입력하지 않은 건이라면 반송이 되는 게 맞는데 배송 완료 상태는 뭔가 잘못된 것 아니냐며 따졌다. 티켓을 판매했으면 배송까지 책임지고 해야 하는데 고객에게 직접 확인하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호통을 쳤다. 백번 맞는 말이다. 번거롭더라도 내가 배송기사에게 확인해야 했는데 주소를 잘못 입력한 고객의 실수도 있으니 귀찮은 문제를 고객에게 떠넘기려다가 된통 혼쭐이 났다.


꼼꼼한 나도 가끔은 귀찮아서 대충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항상 세심함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나는 밴댕이 소갈딱지다. 내가 잘못해서 고객에게 혼이 났으면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하는데 괜히 심통이 나고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배송기사는 고객에게 물품을 배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왜 배송 완료라고 했는지', '관리자가 콜을 당기라고 다그치지만 않았어도 성의 있게 확인해줬을 텐데', '이놈의 회사는 왜 팬클럽 물품까지 팔아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라며 남 탓을 했다.


짜증이 난 채로 다음 콜을 받았다. 1인당 2매까지만 예매 가능한 공연 티켓을 10매 예매해달라는 고객이었다. 예매 매수 제한은 인터넷 예매나 전화예매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하나의 ID로는 2매까지 밖에 예매가 안된다고 안내했다. 고객은 전화예매로는 매수 제한과 관계없이 예매가 가능하다고 방금 공연 기획사로부터 안내를 받았다고 말했다. 예매를 해달라는 고객과 안된다는 나 사이에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갔고 고객은 울컥해서 목소리를 떨며 화를 냈다. 기본적인 원칙이 그렇더라도 고객이 이렇게까지 말하면 담당자에게 확인하는 게 상담원이 하는 일이 아니냐고 내 태도를 문제 삼았다. 별수 없이 고객님께서 확인을 원하시니 담당자에게 문의해보고 연락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화풀이라도 하듯이 엄한 키보드를 마구 두드리며 메일을 써서 본사 담당자에게 보냈다.


10분쯤 후 팀장님이 내가 본사로 보낸 메일을 보고 자리로 불렀다. 본사에서 공유한 내용이라며, 그 공연은 특별히 고객센터에서는 매수 제한 없이 예매해도 된다는 업무게시판의 공지글을 보여줬다. 요새 업무게시판을 확인 안 하고 대충 일하는 것 같다는 농담을 덧붙이면서. 고객에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투로 안내를 했는데 결국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제대로 공지를 하지 않은 관리자에게 화가 나서 이런 특이 건이 있으면 상담원들이 알 수 있게 메신저로 전체 쪽지를 보내거나 공지를 해야지 한 콜 한 콜 받을 때마다 게시판을 검색해보는 것도 아닌데 저런 내용을 어찌 알겠느냐고 짜증을 내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틀렸다'는 말을 들으면 부끄럽고 화가 난다. 그래서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걸까. 틀리는 게 두려워서.


고객에게 바로 전화를 드려 고객센터로 공유된 내용을 미처 못 보고 잘못 안내를 한 점에 대해 사과를 드리고 전화예매를 해드렸다. 배송 문의 건은 기사님께 연락드리니 지금 터미널에 보관 중이라고 해서 재배송을 요청해서 잘 해결됐다. 그 통화를 마지막으로 집에 가려는데 퇴근 시간이 20분이나 지나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도 화가 가시질 않아 씩씩거리며 걷고 있는데 문득 내가 참 못나 보였다. 귀찮아서 내가 할 일을 고객에게 떠넘기다가 혼나고, 내가 꼼꼼히 업무 게시판을 확인하지 않아 실수한 일인데 이 화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년쯤 전 일이 떠올랐다. 대학 겨울방학이 시작하면서 동기 8명과 가평 펜션에 1박 2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진탕 술 마시고 놀고 있는데 순간 분위기가 진지해지더니 친구 한 명이 나에게 주운이는 다 괜찮은데 장난이 심하다면서, 그것만 고쳐주면 참 좋겠다는 말을 했다.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다. 내 행동에 대한 반성보다는 그 상황이 부끄럽고 모욕을 당한 것처럼 느껴져 친구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네가 고쳐줬으면 하는 점도 나의 일부분이고, 그게 싫다면 나와는 친구를 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악의 없는 장난도 받아주지 못하는 친구는 나도 필요 없다며 말을 심하게 했다.


지금은 악의 없는 장난과 농담이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안다. 그 일이 있고 10년 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 대학 동기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나의 잘못을 꺼내서 날 부끄럽게 한 친구의 행동이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친구가 나를 위해서 했던 말임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만약 내가 그때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했다면 지난 10년이 조금은 달라졌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바라볼 용기, 나의 잘못을 인정할 용기, 나는 용기가 없어서 이러고 사는가 싶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없는 것 같아 슬프다.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의 거의 모든 원인인 자존감 부족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수를 실수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수하는 나는 쓸모없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여기는 비약이 내 마음에 있는 듯하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나는 틀리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인정받지 못하고 자란 나의 뒤틀어진 인정 욕구가 나이를 먹고도 해결되지 않아 남의 인정에 목매고 살아가는 것 같아 서글프다.


지긋지긋한 콜센터일 덕분에 나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동안 나는 남에게는 엄격하고 나에게만 관대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완벽해지길 바라면서 완벽과는 거리가 먼 나를 미워하고 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실수할 수 있다. 실수를 개선하면서 배우는 점이 있다는 생각으로 실수를 조금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도 제대로 된 게 없고 고칠 것 투성이인 나란 인간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뭐라도 고쳐나가다 보면 더 나이 들어서는 지금보다 조금 나은 인간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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