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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Oct 20. 2018

2,500원짜리 경위서를 쓰는 마음

10년 넘게 회사에 다닌 선배가 2,500원 때문에 경위서를 썼다. 고객은 배송받은 티켓의 취소가 가능한지 물었고, 선배는 예매내역을 조회했다. 고객센터 전산에 취소 마감시간이 남아 있다고 나와서 취소를 원하시면 배송받은 티켓을 등기로 반송하라고 안내했다. 며칠 후 티켓은 반송처에 도착했지만 취소할 수 없었다. 고객이 예매한 공연은 예외적인 취소 규정이 적용되어, 전산에는 취소 마감 시간이 남아있다고 나오더라도 취소 불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특이한 경우라 상담 시 유의하라고 관리자가 조회시간에 공지도 하고 메신저로 쪽지도 몇 번 보낸 건이긴 하다. 하지만 하루에 수십 통의 전화를 받으면서 특정한 공연의 예외적인 취소 규정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상담하기는 쉽지 않다. 티켓을 반송했지만 취소는 할 수 없게 된 고객에게 티켓의 반송비용 2,500원을 돌려드려야 했다. 관리자는 선배의 실수로 인해 고객센터에서 2,500원을 고객에게 지급하게 되었으니 그에 따른 경위서를 쓰라고 했다.  

고객센터에는 '현금보상'이라는 게 있다. 상담원의 실수로 고객에게 금전적 손해를 끼쳤을 때, 손해액이 명확한 경우에 해당 금액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객이 취소 요청한 건을 상담원이 누락하여 취소되지 않은 채 공연 일자가 지나버리거나, 전화예매를 요청했는데 상담원의 실수로 일자를 잘못 예매해줘서 관람을 못 하게 경우에는 티켓 금액을 고객에게 입금해드려야 한다. 본사의 잘못이 아닌 상담원의 실수로 발생하는 보상은 고객센터를 운영하는 아웃소싱 업체의 몫이다. 그래서 콜센터 관리자는 최대한 상담원의 실수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실수는 생기기 마련이다.


콜센터에서 실수는 없을 수 없다. 꼼꼼하다고 평가받는 사람들도 가끔 실수를 한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근로자가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안 되는 게 맞다. 실수했을 때 관리자에게 질책을 당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무리 그래도 2,500원 실수로 인한 경위서라니, 회사 밖의 친구들에게 하소연하기도 민망하다. 실수하는 상담원도 사정은 있다. 판매하는 상품은 수천 개인데 각각의 공연 별로 할인율, 할인 조건, 공연 관람 시 유의사항이 각각 다르다. 고객 문의를 받고 예매 페이지 안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는 문구를 확인하는데 눈에는 잘 안 들어오고 고객은 확인이 늦는다고 성화다. 콜센터 관리자는 후처리를 줄이고 콜을 받으라고 닦달하고, 오전에 본사로 문의한 건은 하루가 다 지나도록 답이 없다. 상담원에 대한 대우가 좋지를 않으니 금방 그만두는 직원이 많아 숙련된 상담원은 부족하고 신입 상담원들만 넘쳐난다. 이런 상황에서 실수는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업무에 집중하지 못해 실수를 반복하는 상담원은 잘못된 게 맞지만, 업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작은 실수를 경위서까지 받아야 했을까. 상담원의 실수를 탓하기 전에 취소 불가한 공연임에도 취소 마감시간이 남아있다고 보여진 본사에서 만든 콜센터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었던 걸까.

그 망할 공연 때문에 2,500원, 2,800원, 3,000원짜리 경위서를 쓴 동료들이 꽤 있다. 사실 경위서가 별 게 아니라 상담원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실수를 줄이게 하려고 형식상 받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얘기가 직원들 사이에 돈다. 얼마 전 근태가 좋지 않고 상담 태도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던 직원이 있었는데, 아무리 퇴사를 권유해도 끝까지 버티고 남아있어 회사에서 그를 해고하는 데 굉장히 애를 먹은 일이 있었다. 그 일 이후로 회사에서 상담원을 쉽게 해고하려고 조그만 실수에도 경위서를 받고, 나중에 해고할 때 모아둔 경위서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쨌건 간에 2,500원짜리 경위서는 역시 너무하다. 


2,500원의 경위서. 슬프고 분하고 부끄럽다. 내가 경위서에 너무 큰 의미부여를 하는 걸까.


10년간 볼꼴 못 볼 꼴 다 본 선배는 이놈의 회사가 하다 하다 별짓 다 한다며 경위서를 써냈다.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린 선배였지만, 언뜻 웃음 뒤의 모멸감을 본 것 같았다. 고작 2,500원 때문에 '저는 공연의 취소 유의사항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는 실수를 해서 회사에 손실을 끼쳤습니다.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반성문을 써낸 10년 차 선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회사에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이다. 콜센터에 다니며 얻은 것 중 하나는 현실을 낭만적으로만 보려 하는 나의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함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의 현실과 위치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의 현실은 2,500원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곳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직원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다른 세상 이야기인 회사에 5년 동안 다니고 있는 게 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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