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운 Oct 25. 2018

'진상'이라는 이름의 사람들

콜센터 일을 경험해본 이들에게 '콜센터'하면 연상되는 단어를 물었을 때 나오는 답은 무엇일까. 많은 확률로 '진상'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말하는 진상은 상식의 범위를 넘어서 상담원을 몹시 힘들게 하는 아주 일부의 비정상적인 고객이다.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은 절대 진상이 아니다. 현명한 소비자다. 상담원으로 일하며 아무리 고객을 이해하려 해도 이해의 한도를 지나친 진상을 며칠에 한 번씩 만날 수밖에 없다.

지난 5년간 콜센터 일을 하며 겪어온 진상을 유형별로 분류해봤다.


콜센터로 전화를 주시는 고객 대부분은 합리적이고 예의 있다. 아주 일부의 몰지각하고 예의 없는 고객을 진상이라고 한다.



1. 씨X, 미친X, 개XX야! 죽여버린다! - 욕설형

"야 이, 씨XX아. 그따위 대답밖에 못 해? 거기 앉아서 돈 버는 게 쉽지, 미친X아. 너 오늘 잘 걸렸다. 나한테 욕 좀 먹어봐 개XX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리고 그에게 아무런 맞대응도 할 수 없다면? 당황스럽다가 화가 나고 결국엔 슬퍼진다. 고객이 어떤 불편함을 겪었든 간에 상담원에게 욕을 하는 게 정당화될 수는 없다. 욕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 해결과는 더 멀어진다. 다행히 요즘은 욕설을 하는 고객에게는 상담이 어렵다는 경고를 할 수 있고, 3번 욕설을 하면 상담원이 통화를 종료할 수 있다.


2. 목소리가 섹시하시네요 - 성희롱형

나는 성희롱을 겪은 일이 많지 않지만, 분명히 당한 적이 있다. 몇 년 전에는 대학로 성인연극이 많았었는데, 중년의 고객이 이름도 요상한 공연을 말하더니 "근데 이 공연 어디까지 벗나요? 다 나오나요?" 이런 문의를 받은 적이 있다. 당황해서 공연을 직접 관람해보지 않아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성희롱인지 공연에 대한 문의인지 애매하지만, 전화를 끊고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또, 세계 각국에서 참가하는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를 판매한 적이 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고객이 경기에 대해 묻다가 갑자기 "OO나라 남자 거기는 몇 cm에요? 엄청 크다고 하던데…. 맞나요?"라는 질문을 했다. 그런 질문을 계속하며 전화를 끊지 않아 20분 넘게 통화한 적이 있다. 지금 같았으면 상담이 어렵다고 안내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을 텐데 그 당시에는 신입 상담원이라 쩔쩔매며 "말씀하신 내용은 답변이 어렵습니다..."라는 안내만 반복했다. 요새 들어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하면서 성희롱을 하는 고객이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상담원의 목소리가 섹시하다거나, 얼굴이 예쁠 것 같다는 식으로 성희롱을 하는 고객이 있다.


3. 너 일하는 데가 어디야, 내가 찾아간다! - 협박형

과격한 성향의 고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가끔 이런 발언을 한다. "너 내 얼굴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찾아가서 내 앞에 무릎 꿇게 할 거야!" 같은 말에서부터 "야구 방망이 들고 찾아간다", "고객센터 주소 문자로 보내. 내가 찾아가서 불 질러버린다." 같은 심한 말을 하는 고객도 있다.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 가장 무서운 말은 "사시미 칼 가지고 가서 찔러 죽이고 창자를 다 XXX……!!"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할 수 있는지 소름이 끼쳤다. 혹시 퇴근하는 길에 건물 앞에서 칼을 갖고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염산 테러를 하는 게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사실 이렇게 말한 고객 중 99%는 말 뿐이지만, 일부 행동력 있는 이는 고객센터로 찾아오기도 한다.


상담원에게 위협을 주는 심한 언어폭력과 협박을 하는 이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처벌이 이뤄지길 바란다.


4. 그러니까 네가 거기서 전화나 받고 있는 거야. - 상담원 무시형

내게는 욕설보다 더 큰 상처가 되는 말이다. 상담원을 무시하는 뉘앙스로 말을 하는 고객은 꽤 있어도, 상담원을 직접적으로 비하하는 고객은 드물다. 지금까지 딱 한 번 나보다 7~8살쯤 어린 고객에게 "그러니까 네가 그따위 일이나 하면서 나한테 욕이나 먹고 있는 거야. 평생 그렇게 살아라."라는 말을 들었다. 자랑스럽지는 않아도 정정당당하게 노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무시를 당하니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대학 안 나왔지, 공부 드럽게 못했지? 그러니까 나이 처먹고 전화나 받고 있지!"라는 말을 하는 고객도 있다. 그런 말을 하는 고객이 자신의 무식함과 천박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불쌍하다고 여기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비참하지 않을 상담원은 없을 것이다.


5. 사장, 팀장, 윗사람 바꿔!!! - 상급자 바꿔형

고객센터에서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을 때 "사장 바꿔!! 대표이사 바꿔!!"라며 소리 지르는 고객이 있다. 상담을 하다 보면 고객이 납득하기 어려운 안내를 드릴 때가 있고, 그런 상황에서 고객이 책임자와의 통화를 요청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기업에서 제공한 상품이나 서비스에 전혀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상담원을 위협하기 위해 윗사람을 찾는 고객은 정말 싫다. 가끔은 윗사람이 아니라 "남자 or 여자 상담원 바꿔!"를 말하는 고객도 있다.


6.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말실수 인정하시죠? - 꼬투리 잡기 선수형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며 상담원을 괴롭히는 유형이다. 문제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매 페이지, 취소 환불 규정, 이용약관에 기재된 단어 하나, 글자색, 포인트 크기 등이 잘못되었다고 시비를 걸며 자신의 실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기 위해 기업의 탓을 하며 억지를 부리는 고객이다. 이들과 통화 시에는 단어 사용, 말투에 유의해야 한다. 본인 실수임에도 상담원이 조금이라도 잘못된 안내를 하거나, 불친절한 응대를 하면 상담 태도를 문제 삼으면서 상담원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운다. 통화하기 정말 피곤한 유형이다. 나는 상담원으로 일을 시작한 이후 다른 고객센터에 전화하면 더욱 친절하게 되는데, 이 유형에는 의외로 상담원 일을 하고 있는 고객도 꽤 많다. 


어떻게 상담원을 괴롭히면 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당한 대로 남을 괴롭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7. 규정이고 정책이고 난 몰라! 그냥 취소해줘! 당장. 빨리!!!! - 우기기형

조금 하수의 진상 유형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무논리로 진상을 부리는 모습이 신선해 보이기도 하다. 취소가 불가한 점, 취소 수료가 부과되는 점에 대해 차근차근히 안내를 드려도, "난 그런 거 몰라. 난 수수료 못 내니까 그냥 취소해줘!!!" 라며 억지를 쓴다. 보통 제풀에 제가 지쳐 "내가 다시 여기 이용하나 봐라!"라는 말로 전화를 끊는 경우가 많지만, 끈기 있는 진상의 경우 통화가 굉장히 길어지기도 한다.


8. 너 내가 누군지 알아? - 자기 PR형

기업이나 상담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며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유형이다. "너 내가 뭐 하는 사람인 줄 알아"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부터 "지금 말씀 후회 안 하시죠? 전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크게 잘못하고 계신 거예요. 회사에도 좋을 거 없을 텐데 다시 확인해보시죠?" 라며 은근한 협박을 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나 때문에 회사에 불이익이 생기는 게 아닐까 겁먹은 적도 있지만 5년 일한 지금은 하나도 무섭지 않다.


9. 순 날강도 아니야? 생때같은 내 돈을! - 구두쇠형

통화비가 아깝다며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자신에게 전화를 달라는 고객이 있다. 이런 고객에게 바로 연락을 드리는 것은 금하고 있는데 그러면 갑자기 "전화가 잘 안 들리는 데요, 저한테 전화 좀 주시겠어요?"라며 연기를 하기도 한다. 기업의 잘못이 있다면 적은 금액이라도 보상받아야 하는 게 맞지만, 엄연히 자신의 잘못임에도 적은 돈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고객도 있다. 수수료 1천 원, 배송비 2,500원이 아까워 막말에 협박, 거짓말까지 하는 고객을 보면 참 갑갑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들은 본인이 똑똑한 소비자라고 생각할까? 그들이 항상 하는 말이다. "아니 내가 돈 1천 원이 아까워서 그러겠어요? 2,500원 때문이 아니라 기분이 나빠서 그래요." 과연 진심일까? 정말 알고 싶다.


이런 고객을 만나면 돈이 무섭다. 돈이 얼마나 중하면 저럴까. 아니면 이렇게 살아야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상담원이 눈물을 쏟는 대부분의 원인이 진상 고객이다.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상담원이라는 이유로 폭언과 무례함을 견뎌낼 수밖에 없다. 진상 고객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게 상담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인가 고민해봤지만,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고객센터에서 일하면 어쩔 수 없이 진상을 만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들어오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받는 말을 견디는 게 상담원의 책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담원이 진상으로부터 보호받게 되기를 바란다. 상담원은 죄인이 아니며, 누구도 타인의 마음을 짓밟을 권리는 없다.

이전 07화 오늘 내가 화난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