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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화영 Oct 14. 2023

불안의 기원

10월 22일

새로운 회사로 이직한 지 3개월이 되었다. 수습기간이 종료되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시점이 된 것이다. 분명 그 시점이 되었는데 아직 별다른 안내를 받지 못했다. '수습 기간이 끝났으니 이제 정규직으로 전환 계약을 합시다.' 혹은 '수습기간 동안 당신이 보여준 것으로 평가했을 때 우리 회사와는 맞지 않으니 정규직 계약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얘기가 있어야 한다. 나 개인에게는 중요한 일인데 이 일을 의사결정하는 사람이나 업무 담당자에게는 그저 처리해야 하는 하나의 행정적인 일 일지 모르겠다. 뭐 생각해 보면 나도 많은 일들을 그렇게 처리해 왔을 것이다. 어떤 시점이 되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늘 불안해진다.


분명 때가 되었는데 기대했던 일이 안 일어나는 순간

매년 연말이 다가오면 장모님께서 내년 달력을 받아오신다. '비타민약국'. 벽에 걸어 놓는 달력인데 달력의 모든 장마다 아래쪽에 큼지막하게 '비타민약국'이라고 쓰여있다. 장모님께서 아는 분이 운영하는 약국인지 매년 그 달력을 받아오셔서 가족들에게 나눠주신다. 달력을 받아서 와이프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족의 기념일을 달력에 표기하는 일이다. 아이생일, 남편생일, 친정엄마 생일, 아버지 기일, 결혼기념일, 본인 생일, 조카들 생일까지 올해 달력에 표기된 가족 기념일을 보면서 똑같이 내년 달력에서 날짜를 찾아 표시를 해둔다. 이런 아날로그적 감성이 나쁘지 않다.


10월 22일

그 날짜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아래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내 아기를 기억합니다.' 가족 기념일이 아닌데도 와이프가 매년 달력에 표시하는 날이다. 벌써 13년 동안이나 그렇게 하고 있으니 참 오래도 되었다. 14년 전, 10월 22일. 나도 그날의 여러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첫 번째 아이의 출산 예정일 바로 전날이었다. 와이프가 밤에 샤워하다가 뱃속 아이가 이상한 것 같다고 해서 급하게 차를 몰고 함께 병원에 도착한 순간. 검사실 밖에서 별일 아닐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시는 장모님. 산부인과 다른 층에서 급하게 장비를 옮겨오는 간호사들. 수술실에서 눈물을 머금고 누워있는 와이프. 정확한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는 의사 선생님. 내 몸에 있는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느낌. 뱃속에서 나오려는 의지가 없는 아이를 혼자 힘으로 밀어내는 와이프. 그걸 지켜보고 있는 나의 모습. 혼자 나와서 병원 건물 주변을 돌며 흘렸던 눈물들. 아이를 화장하기 위해 화장터에 가서 접수를 하고 기다리는 순간. 내 손에 받아 든 한 줌도 안 되는 뼛가루. 적당한 곳이라 생각한 곳에 뿌려주고 돌아오는 차 안. 목포에 계시는 부모님께 설명드리기 위한 전화 통화. 자동차 뒷 유리에 미리 붙여 두었던 '아이가 타고 있어요' 스티커를 떼어내면서 들었던 생각들. 아이를 위해 미리 준비했던 범퍼침대를 치우던 순간들.


나는 매년 10월 달력에서 그날을 보고도 애써 모른척하고 지나친다. 하지만, 그날의 여러 순간들은 14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모두가 기대했는데, 아이는 그렇지 못했다. 분명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뻔한 영화의 정말 영화 같은 순간들이 내 인생에도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 매년 그날을 달력에 표기하는 와이프도 분명 그럴 것이다.


예정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생기는 불안감

어떤 일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누구나 느끼면서 살아간다.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그런 감정을 강하게 느낀다면 14년 전 그 일이 기원일지 모르겠다. 하루만 지나면 건강한 아이를 만날 것이라는 나와 와이프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어제는 회사에서 보낸 정규 근로계약서를 이메일로 받고 서명을 했다. 조금 늦었지만 이번에는 기대했던 결과를 받았다.

이제는 나도 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사람 마음처럼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어떠한 결과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결과가 안 좋았을 때도 다시 일어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언젠가 내 인생 역사 전체를 펼쳐놓고 봤을 때 기대했던 결과를 얻었던 일이 그렇지 못한 일보다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완벽한 인생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일주일 뒤면 10월 22일이다. 올해는 내가 먼저 와이프에게 말을 건네어야겠다. 오늘이 그날이라고. 나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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