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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그리움만 쌓인다

나의 적십자 다이어리

by 포데로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1998년 나는 군복무 중이었다. 유람선을 타고 금강산으로 관광갈 수 있게 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북한이라니..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아, 나도 제대하면 금강산에 한번 가 보고 싶다.'


그때 병장 월급으로 1만3000원을 받았다. 해상으로 금강산 관광을 가려면 300만원 정도 내야 한다는 걸 알고는 '내가 그 돈이 어딨어' 가고 싶은 마음을 슬그머니 접어 넣었다.


기회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2004년도 중순이었다. 청주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버스 한 대 인원을 모아서 무박 2일 일정으로 금강산에 갈 계획인데 당신도 가겠느냐고 여자친구가 제안했다. 2004년 7월부터 육로 당일관광이 개시된 덕분이었다. "당연하지. 얼마나 가 보고 싶었던 금강산인데.” 이때가 아니면 내가 언제 금강산에 가보겠는가 싶어서 신청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밤 12시에 청주에서 출발하는 관광버스에 올랐다. 불꺼진 버스안에서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해뜰녁에 강원도 고성에 도착했다. 관광시간이 시작되고 우리는 출입국사무소에서 수속을 밟은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북한 직원이 여자친구의 출입증을 살펴 보더니 “젊은 사람이 국장으로 꽤 높구만요."라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


모든 게 신기함 그 자체였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붉은 글씨라든지,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들이 남한에서 보기힘든 장면이었다. 그렇게 나는 구룡폭포까지 걸어 올라가 아름다운 절경을 구경도 하고, 금강산호텔에서 덜 차가우면서 면발이 통통한 북한식 냉면을 맛있게 먹기도 했다. 기념품을 사려고 온정리휴게소에 들렀는데 사려던 엿이 '북한제'가 아니라 우리가 출발했던 충북의 진천에서 만들어졌다고 쓰여져 있어서 한바탕 웃었다. 단 한 번이었지만 아름다운 금강산에 가 봤다는 그 추억 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소원을 성취한 것 같았다.




남북관계가 점점 개선되는 분위기였다. 회사도 분주해졌다. 적십자 로고를 찍은 쌀과 비료가 선박에 실려서 북한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인솔단장으로 북한을 다녀온 선배들이 돌아와서 다녀온 얘기를 해 줬다. 무용담같은 현지 이야기들이 재밌었다. 묵은 숙제와도 같던 이산가족 상봉이 자주 열렸다. 상시적으로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할 수 있도록 금강산에 면회소 공사도 시작되었다. 금강산에서 상주하면서 근무할 직원을 공모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금강산하면 '이산가족상봉'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나는 2009년 7월부터 구호복지팀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4년여간 이산가족 접수업무를 했다. 평소에는 이 일로 인해 특별히 바쁜 것은 없다. 이미 많은 이산가족들이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이산가족상봉이 진행되면 그 뉴스를 보고 미신청자들이 찾아오거나 등록이 잘 되어 있는지 여부를 재확인하는 전화가 더러 왔다. 찾아오시거나 전화하셨던 몇 분들이 기억난다.


이산가족 상봉만 되면 우시면서 사무실로 전화하는 할머니가 계셨다. 할아버지가 실향민이셨는데 이미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염원이던 가족상봉을 꼭 본인이 살아 있을 때 해 보고 싶다며 전화하셨다. 나는 말씀을 들어드리기만 했다.


한 할아버지는 형님을 찾기 위해 이산가족 신청을 했었는데 세월이 훌쩍 지나도 소식이 없다며 언제 나에게 기회가 오느냐며 답답하다고 전화하셨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전 받은 건강검진에서 간암을 진단받고 병원으로부터 얼마남지 않은 시한을 선고받았다고도 하셨다. 이제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북에 계신 형님이 살아계신것만이라도 알고 싶다는 거였다.


또한 북에 있을 가족이 만나고 싶다는 통천군 출신 할머니, 자신을 대신해 의용군으로 간 형님을 찾고 싶은 할아버지, 형부를 따라 북으로 이주한 두 언니를 만나고 싶다는 할머니도 있었다.


만나지 못해서 천추의 한이겠지만, 며칠 만난다고 그동안 쌓아왔던 그리움이 다 풀리지는 않을거란 생각이다. 만나면 또 만나고 싶고 더 생각나서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이산가족 상봉 희망자는 2009년 87,000여명에서 2019년 53,000여명으로 크게 줄었다. 사망자수가 생존자 수를 넘어섰다. 연령으로는 생존자의 85%가 70세 이상의 고령자라고 한다. 이 어른들은 70여년 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것도 모두 고통이라고 한다. 그분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적십자는 이산가족 상봉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2020년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 되는 해다. 남북관계 전반의 상황에 따라 이산가족 사업이 좌우되고 있지만, 모쪼록 올해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재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금강산을 왕래하는 이산가족들이 많았으면, 아름다운 금강산에서 보고 싶었던 가족을 만나 함께 구경하시면 좋겠다.



분단과 전쟁을 직접 겪으며 그 와중에 고향을 잃거나 가족과 흩어져 소식을 모른 채 살아온 실향민과 이산가족 생존자들이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이산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인도주의 차원에서 헤어진 가족을 찾아주는 사업을 전개하여 왔다.

적십자는 혈액, 병원, 구호, 사회봉사, RCY 안전 등 많은 사업들을 하고 있지만, 국민들에게 적십자하면 어떤 사업이 떠오르느냐고 물어보면 유독 이산가족상봉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 출처 : VO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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