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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나그네 윤순학 Oct 17. 2021

노인을 위한 골목은 없다


우리나라 방송 역사상 최장수 프로그램은?      


그렇다. 짐작할 것이다. 단연코 1등은 ’ 40세. 지천명‘의 세월을 넘은 ’전국노래자랑‘이다. 1980년 11월 30일 첫 방송된 이후 이제 42세 중년의 나이를 먹었다. 당연히 일등공신은 올해 95세의 국민 MC, 송해의 역할이 압도적이었다. 1986년부터 방송을 맡았으니 35년 가까운 세월을 구수한 입담과 털털한 이웃집 할배의 넉살로 일요일 온 국민에게 웃음과 흥을 돋우는 피로회복제 역할을 했다. 


코로나로 무기한 휴방에 들어간 전국노래자랑은 언제 다시 시작할진 아직 모르겠지만 최근 한 방송 인터뷰에서 그가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세월의 나이를 어찌 이기랴? ’후임 MC도 준비해놨다고 한 모양으로 조만간 은퇴를 시사했다.     


종로 3가의 ’ 송해길‘ 또는 ’ 락희 거리‘로 알려진 이곳은 그가 수십 년간 단골로 다녀간 거리이다. 한 그릇 2천 원으로 유명한 ’ 송해 해장국집‘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국민 스타의 지위임에도 소탈한 모습으로 친근하게 다가왔던 그의 모습이 선하다. 이 식당을 비롯해 락희 거리는 나도 가끔 찾는 익숙한 거리이다.  

     

송해길, 락희 거리는 ’어르신 거리‘로 유명한데, 처음 2~3년간은 활성화되는 듯했으나, 거리 조성 초창기 반짝하고 이후엔 자자체의 무관심과 상권의 이기주의로 점점 이 거리를 찾는 어르신들이 줄어들고 있다. 저렴하고 가성비 높은 식당, 이발소등이 점점 단가가 올라가거나 문을 닫고, 새로운 프랜차이즈 식당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주 방문객층은 노년보단 중년으로 넘어가고 마주하는 익선동에 신세대들이 유입되며 그간 이곳을 찾던 어르신들의 마음이 불편해졌을까? 게다가 코로나는 이들의 발길을 더욱 움츠리게 했다.     


노령화 시대, 실버시대를 맞아 지자체(종로구) 최초로 들어선 어르신 골목이 ’ 모범사례‘로 전국으로 확산되기는커녕 너무 일찍 시들어가는 느낌이다. 2020년 통계로 80대 이상 노년층이 2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종로 3가 ’ 락희 거리‘는 사실 일본 도쿄의 대표적인 실버 거리. ’스가모 거리‘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현재는 일본도 코로나에 그때보단 못하겠지만 스가모 거리는 매년 천만의 노인들이 찾는 명소. 이른바 ’노인들의 천국‘이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도쿄의 패션 1번지 하라주쿠만큼 노인들이 많이 몰린다고 해서 ’노인들의 하라주쿠‘라고도 불렸다.      


약 800m에 이르는 이 거리엔 옷집, 식당, 제과점, 안경점, 카페 등 200여 곳의 노인 전문 상점이 들어서고 고령층이 선호하는 인테리어, 색깔, 스타일, 맛의 제품으로 가득 채워졌다. 일본의 노인들은 빨간색 내의를 좋아하는데 이 빨간 복 내의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도 여럿 있다. 스가모 거리를 담당하는 지자체는 노인들의 안전한 도보를 위해 인도 문턱을 낮추고 곳곳에 벤치와 노인 편의시설을 설치하고 꾸준히 관리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고령화 국가인 일본은 이렇게 성실하고 치밀하게 실천하고 있다.    

   




우리에게 노인을 위한 골목은 없는 걸까?     


코로나 2년 차인 올해는 가히 영화 ’미나리‘의 해였다. 한국 이민가족을 그린 이 작품의 주인공. 윤여정은 자신과 빙의된 듯 한국 할머니의 모습을 완벽히 그려내 한국 최초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전 세계가 그녀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열정에 찬사를 보냈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들은 또 있다. ’한국인의 밥상‘, 영원한 ’수사반장‘ 최불암. 해외여행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의 이른바 실버 F4.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 할배들이다. 이들 모두 현재까지 방송, 영화, 연극 등에서 아직도 종횡무진 맹활약 중이다. 나이 일흔 넘어 잭팟을 터트린 할머니 유튜브 스타, 박막례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깐부잖아!”, “그 돈은 자네의 운과 노력의 대가야. 자네는 그걸 쓸 권리가 있어”, 

“자네, 정말, 아직도 사람을 믿나?”, “어릴 땐 말이야. 친구들하고 뭘 하고 놀아도 재밌었어”  

   

올 하반기 전 세계를 휩쓸어버린 ’오징어게임‘의 게임 설계자 001번 노인 역의 오영수도 이에 가세한 열혈 할배이다.      


요즘 주변의 공공장소나 거리를 한번 둘러보자. 거리 청소, 교통안내, 전철역 도우미 등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노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정부, 지자체의 노인 일자리 창출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많은 실버들이 역사 해설가. 지역 관광안내요원, 바리스타로 맹활약 중이다. 인생은 육십부터 ~ 이젠 팔십전에는 이들도 청년이라 주장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는 대한민국. 이젠 '뉴실버세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신체적인 건강도 좋으면서 사회 활동에 대한 열망이 높고, 독립적인 생활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뉴실버세대다. 소일거리로 여생을 보내거나 손주를 돌보는 등 집 안에 갇혀 있는 대신,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개척하고 사회에서 쌓은 경험과 삶의 지혜를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1인 가구 증가, 핵가족 시대로 요즘 삼대(三代)가 함께 사는 가정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흔한 가족 구성이었지만, 단촐해졌다. 한편으로 여전히 ’홀로 노인가구‘와 ’고독사‘하는 노인들의 안타까운 소식도 자주 들려온다.     


우리도 실버 세대들이 당당히, 즐기며 생활할 수 있는 골목. 거리를 더 많이 조성해야 한다. 중요한 건 노년 세대만이 아닌, 청년, 중장년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더 중요하다. 이제 ’노인을 위한 골목은 아주 많다‘로 바꾸자.     


내가 골목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네 정(情)이 넘쳐나고 소박한 웃음과 사랑이 꽃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길이 좁아 조금 불편해도, 조금 너저분해도 사람과 사람이 지나치고 부대끼며 살며 모든 세대가 함께 내오내오 더불어 세상 이런 골목이 그래서 더욱 반갑고 고맙다.          



■  황홀한 골목을 위.하.여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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