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항우 화이팅. 토닥 토닥.
내 아이는 타고난 성품이 불같은 면이 있었다. 특히 게임을 하면 반드시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자신이 지면 억울해하면서 남의 승리에 분노하기도 했다.
얼핏 내 모습이 보였다. 소싯적의 나는 전투력이 막강했다. 싸움을 안 하면 안 했지 한번 말싸움이라도 붙으면 반드시 이기고 싶어 했다. 게다가 배드민턴, 탁구 같은 운동은 이를 악물고 임했다.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하면서도 이길 때까지 상대를 잡고 게임을 할 때가 많았다. 웃자고 시작한 운동에 죽을 듯이 몰두했다.
지금이야 누가 뭐라 해도 그래 니 말도 일리는 있구나 하면서 슬쩍 빠지기도 하고 어쩌다 배드민턴 시합을 할 때면 상대에게 강스매싱을 날리긴 해도 날아온 공은 무리해서 치지 않는다. 무릎관절이 상할까 싶어 주변에 오는 공 위주로만 쳐낸다. 이렇게 맥 빠진 엄마와 하는 게임은 아이에게 재미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보드게임을 배우러 다녔던 아이는 집에서도 같이 해달라고 졸랐지만 나는 솔직히 ---이거 왜 하나.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니--- 싶었다.
아이는 보드게임이 하고 싶어 못 견디겠고 나는 하기 싫어 못 견딘 며칠 동안 다른 방법을 찾았다.
아이에게 장기를 가르쳤다. 불면의 밤. 장기 방송을 보면서 터득한 장기 실력을 알차게 써먹었다.
처음엔 차포떼고 10번 물러줘 가며 가르친 장기를 아이는 재밌어했다.
그렇게 몇 달 지나 실력이 늘어났고 차를 떼고 몇 번 물러주면 5판에 한 두 판은 나를 이기기 시작했다.
눈앞의 수를 둬서 이기는 게 아니라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내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10살 치고는 꽤 센스 있는 기보를 펼쳤다.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명칭을 알려주며 초나라와 한나라 이야기도 해줬다. 항우와 유방을 비교해가면서 그들의 전쟁과 삶을 곁들여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유방이 결국 한나라의 황제가 된다.
좋은 집안의 인물 좋고 엄청난 실력자인 항우가 아닌 천한 신분의 게으른 유방이 황제가 되었다는 말에 아이는 깜짝 놀랐다.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어른들은 보통 공부 열심히 하고 성실해야 성공한다는 말을 지겹도록 가르치니까. 모든 조건이 훌륭했던 항우를 제끼고 그저 그랬던 유방이 황제가 됐다?
최대한 내 생각을 빼고 항우와 유방에 대해 사실 위주로 알려주려고 했다. 내가 뒷담화에 소질이 없어서 그랬을까. 물론 아니었다. (겁나 자신 있는 뒷담화...)
유방은 남의 말을 잘 수렴하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할 줄 알았기에 가능했다라는 뻔한 말들, 황제가 되려면 항우처럼 스스로의 원칙에 갇히지 말고 유방처럼 비굴할 정도로 유연한 대처도 필요하다는 흔한 말들. 해줘야 하나 싶었다.
다음 보기의 글을 읽고 저자의 의도가 잘 드러난 표현을 고르시오.라는 질문에는 뭐겠어? 여기 지문을 보면 항우는 범증이 한신을 크게 쓰거나 죽이라 충고했으나 그 어느 쪽도 따르지 않았다. 밑줄... 또 여기 이 부분. 그는 유방을 단칼에 죽일 수도 있었지만 결국 풀어준 셈이었다. 자. 또 유방은 도망치는 중에 수레가 무겁다며 자신의 아들을 내던졌다. 이에 하후영이....
그러니까 뭐겠어? 군사 전략 하나하나 자신의 손을 거쳐야 만족했던 항우와 급변하는 전쟁통에 탄력 있는 전략과 장수들의 재량을 인정한 유방. 저자의 의도는 바로.....
이래야 하는가 말이다.
전쟁은 승자의 기록이다. 즉 승리하신 분은 그 방귀도 마치 꽃향기와 같더라가 가능해진다. 이길만 해서 이겼는지 아니면 이기고 보니 과연 이길만 하였더라 인지 구분이 명확한가 궁금해진다. 매일 12시간씩 연습했더니 챔피언이 되었다는 이야기와는 결이 다르다.
전쟁은. 저 혼자 훈련하고 저 혼자 잘나 이기는 판이 아니다.
나도 잘해야 하고 내 부하도 잘 따라줘야 하고 때마침 군량미는 빵빵하지 날씨는 적이 죽기 딱 좋다면 이긴다.
항우는 항우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고 유방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전쟁의 승패는 그 둘의 지략을 넘어선 다른 것들이 결정짓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전쟁을 인생으로 바꿔도 말이 된다. 거기서 싸우는 우리들 역시 매 순간순간 항우가 되고 유방이 되어 판단하고 선택한다. 아낙에게 밥을 빌어먹고 건달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가던 한신을 껴안을지 내쫓을지 결정해야 한다. 당신이라면 과연 그 순간이 쉬울 수 있을까.
전쟁이 그렇고 인생이 그렇다. 이미 다 끝난 판에 이건 이랬어야지. 저건 잘못했네 평가질은 쉽다. 나와 같은 편이 되어 함께 싸우지 않은 사람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그 당시 그 현장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간절히 승리를 원한 건 그가 아니라 바로 나였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 이기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을 꼭 고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수없이 닥쳐올 인생의 자잘한 전투 앞에 그 에너지는 어쩌면 큰 도움이 되겠지. 싸울 땐 또 화끈하게 싸워야지. 일찍 전투력을 잃어버린 에미가 지금 보니.... 내 인생은 너~~~~~무 태평성대였어. 살은 쪘는데 전리품이 없으니 말이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 아픈 허리를 주무르는 아버지 눈에 아들이 보인다. 전장에 나가 큰 공을 세울 거라며 야무지게 칼을 집어 드는 아들이 보인다. 에고... 귀여운 것... 너 지금 칼 거꾸로 들었어 인마....
펄펄 끓는 그 힘으로 으라라라랏!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앞으로 달려 나간다. 적들을 물리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겠습니다아! 외치는 아들이 최선의 선택을 했기를 믿어본다.
눈앞의 마를 잡겠다고 차를 움직이다 포에게 차를 잡혀버릴 수도 있겠지. 물러주고 또 물러주며 기보를 다시 살펴보기를 반복하며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겠지. 장기의 판세를 읽고 적절하게 기물을 활용하는 법을 깨우치게 되겠지. 필요한 것은 이기려는 마음과 지치지 않고 덤벼드는 열정이겠지.
인생이란 실전에 나가기 전 이 작은 장기판에서 마음껏 너의 수를 펼쳐보겠지. 왕을 지키기 위해서 때론 하나의 졸도 소중하다는 것도 느끼겠지. 그 옆 어디선가 구시렁구시렁 늙은 입으로 훈수 두는 에미의 조언도 때론 귀담아 들어주겠지.
이 전쟁에서 내가 물려준 그 불같은 성품이 아이에게 훌륭한 무기로 진화하기를 바랄 뿐이다.
추신 : 참고로 나는 한신을 가장 좋아했다. 한신 그는 애정결핍에 조울증이 있지 않았나 멋대로 짐작해본다. 장량도 도망친 마당에 그 영리한 한신이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한낱 필부였던 여치의 손에 순순히 죽어줬을까. 애통하다. 그 당시 우울증 약만 있었더라면 한나라 황제는 한신이 될지도 몰랐을 것을...(라고 상상해봅니다요. 늬예늬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