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죽음은 새로운 그리움의 시작이었다.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육수를 내고 불린 미역을 마늘 참기름에 볶아 미역국을 끓였다. 식탁 옆모서리 쪽에 의자를 하나 더 놓고 국 두 그릇을 담아 양쪽에 놓았다. 밥을 데우고 굴비 살을 발라 김치랑 반찬을 챙겨 식탁에 앉았다. 오늘은 지난가을에 이승을 떠난 아내의 생일이다. 만 69살이니 집 나이로 칠순 생일인 셈이다. 건강하게 살았더라면 아이들과 함께 칠순을 축하하고 즐거워했을 날인데, 오늘 이 홀로 노인의 초라한 아침상에 미역국 한 그릇으로 의미를 그려보고 있다. 그녀가 좋아하던 멸치 미역국을 수저로 떠서 빈 의자를 보다가 내 입에 넣었다. 가슴 저 아래에서 묵직한 느낌이 치밀어 국이 넘어가지 않았다. 밥에 굴비 살을 얹어 먹여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자리는 빈 의자뿐이다.
닿을 수 없는 그리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다하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이 시간이 흐르면 줄어들겠지 생각한 내 짐작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파 누워있던 동안 간병인으로 보호자로 살면서 겪어낸 시간은 내 의무이며 책임을 다하는 업무적인 일상으로 흘러갔다. 지난 시절의 고왔던 모습이 틈틈이 그리웠지만, 짊어진 역할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어 심각하게 느낄 수조차 없었다. 그랬는데, 이제 그녀가 떠나고 나서는 그 오랜 시간의 더께에 켜켜이 쌓였던 모든 감정이 들고일어나 내 가슴을 휘저어 감당하기 어렵게 한다. 아프기 전의 고운 모습이 그립고, 오랜 투병으로 뒤틀려버린 그녀의 처연한 노력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일에서 내가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 좀 더 챙길 걸, 그랬더라면 아파 눕지 않았을 것이라는 죄책감마저 슬며시 끼어들어 날 아프게 한다.
작년 오늘에는 그녀가 있던 요양병원 근처 꽃집에서 예쁜 꽃바구니를 만들어 병실에 걸어주었다. 색색의 장미와 여러 가지 꽃으로 가득한 바구니를 보며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좋아하다가 한참 동안 눈을 질끈 감아 보이며, 내게 ‘고맙다’ ‘사랑한다.’는 사인을 보내고 끝내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는 바람에 나조차 울고 말았었다. 그날 꽃집 여주인은 내가 그 전 해에도 꽃바구니를 해간 일을 기억해내고서 꽃바구니 값 5만 원 가운데 2만 원을 내게 돌려주며
“내년 생일에도 꽃바구니를 만들어 가시면 더 예쁘고 크게 만들어 드릴 게 꼭 오세요.”라고 했다. 제발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했지만, 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 자전거를 타고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는 추모공원에 가다가 자전거를 돌리고 말았다. 오늘은 그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항아리를 도저히 평온하게 볼 수 없을 듯해서다.
70살을 넘어서며 내게 큰 변화가 왔다. 웬만한 일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많아졌다. 슬픈 노래에도 눈물이 흐르고 영화를 보아도 쉽게 눈물이 난다. 책을 읽다가도 주인공이 역경에 처하는 장면에서는 책을 덮고 쉬었다가 다시 읽어야 한다. 더구나 작년 가을에 아내를 보낸 뒤에는 더욱 심해져 TV에서 가수의 열창이 나오면 눈물이 철철 흐른다. 어린아이의 감성이 내게 온 것인지, 늙어 주책바가지로 변한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 자전거를 되돌린 일도 추모공원에서 아픈 그녀의 흔적을 보고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이다. 오랜 세월 아내의 병을 생각하며 살아오면서 그녀는 내 삶의 목표였고 생활 그 자체였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살아온 16년에서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쫓겨 나와 모든 것이 어설프고 생소하다.
간병인 생활을 벗어나면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굴레를 벗어 버리면 자유로 우리라고 생각했다. 역마살이라도 끼었는지 쏘다니기를 좋아해서 구실만 있으면 어디든 나가야 했던 내가 발이 묶여 살면서 얼마나 갈구하던 자유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를 잃고 내게 돌아온 자유로움은 자유가 아니었다. 그녀 없이는 자유도 즐거움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이제야 실감하며 당황하고 허둥대고 있을 뿐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땀을 흘리며, 넘어지고 찢기면서 산이 험하다고 투덜대다가 갑자기 산봉우리가 없어진 경우와 같다. 갑자기 생소하고 평평한 땅에 떨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다. 여태 살아온 그 나라 그 세상인데 내게 다가서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낙하산 없이 높은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사람처럼 다치고 부러져 아픈 데다, 아직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다.
죽음은 세상에서 존재가 사라져 없어지는 소멸이어서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은 내게 그녀의 죽음은 새로운 그리움의 시작이었다.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화사함과 열정과 추억이 결합하여 싱싱하고 간절한 그리움을 조립해냈다. 이 그리움은 반세기의 인연을 넘어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풍상과 즐거움과 슬픔을 포함하고 있어서 절실하면서 아련하다. 한마디로 이름 지을 수 없는 포괄적이고 강렬한 그리움에 나는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다. 거기에 더하여 긴 세월 동안 함께 투병하면서 생겨난 전우애戰友愛와 지켜줘야 할 보호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이 가미되어 더욱 아프고 쓰리다. 이 새로운 시작이 어디로, 어떻게 변화하고 이어갈지 아직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다. 짐작하는 일은 남은 생애에서 이 새로운 아픔을 벗어버리기 힘들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칠순 생일이었지만, 떠나버린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이 함께 식사라도 하자고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래도 음식이 제대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아 나중으로 미루었다. 죽은 자에게 산자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고 어디선가 본 일이 있다. 과연 그런 것일까?
주변에서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날 놀리기도 하고, 먼저 간 그녀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 오랜 세월을 돌보았으니 지겨워야 할 터인데 되레 그리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긴 세월 땀 흘리며 오르던 높은 산이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그런 경우를 당해보지 않았으니까.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진 지금, 뭔가 살 구실을 찾느라 허둥대기만 한다.
생일 꽃바구니를 만들지 못한 아쉬움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이제 나도 내 글에 그녀를 적어 넣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