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쉼 없이 변한다.
소리의 레이어 Layer를 찾아
새벽잠에서 깨어 커튼을 걷고 내려다본 세상이 하얗다. 잠에서 덜 깬 눈에 보인 하얀 세상에 줄지어 세워진 자동차들은 모두 같은 색이었다. 크기가 조금 다를 뿐, 새 차나 헌 차를 구분할 수 없고, 색이 모두 감추어져 다 희고 고만고만한 듯 보였다. 자동차만 그런 게 아니라, 보이는 게 모두 하얗고 아무것도 없이 지워진 듯 느껴졌다. 검은 아스팔트 도로와 붉은 포장도로의 색이 모두 같았다. 밤새 내린 눈이 세상을 제멋대로 덧칠해버렸다.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오는 이른 새벽의 눈 덮인 정경은 아련한 그리움 같은 유혹을 담고 있었다. 바람도 밤새 눈을 날라 쏟아붓느라 고단해서, 눈을 얹고 서 있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졸고 있는지 조용했다.
눈 내린 아침의 멀고 아득했던 소리의 기억을 떠올리며 베란다 창을 열었다. 어릴 적에 겨울방학 때 늦잠을 자고 있으면 아버지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이놈들아! 눈 왔다. 어서 일어나 눈 치우고 밥 먹어야지.” 하시던 그때, 정신이 번쩍 들도록 찬 바깥 기운을 따라 들려오던 소리가 그리워서다. 눈 쌓인 날이면 아이들이 울타리 밖 눈밭에서 뛰놀며 떠드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그 먼 소리가 들리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뛰어 나가 눈밭을 뒹굴고 목청껏 소리치며 놀았다. 이 나이에 이르도록 겨울마다, 눈이 내린 새벽에는 항상 그때의 아이들이 떠들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아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소리를 다 받아 먹어버리고 조금만 남겨놓았기에 들리는 소리는 멀고 아득했다. 아득한 그 소리는 부모와 형제들의 사랑 속에서 잘 뛰어놀기만 하면 되었던 행복한 시절의 그리움 같은 신호였다.
그 소리가 다시 들릴 까닭이 없지만, 베란다 창문과 방충망까지 열어젖혔다. 청량한 새벽의 기운이 한꺼번에 쏟아져 얼굴과 드러난 맨살에 찌르르하게 덤벼왔다. 그러나 이미 봄이어서 차가움은 견주어 볼 수 없이 미약했다. 그리고 눈에 먹혀 아득하게 들리기를 기대한 소리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너무 이른 새벽이어서 들릴 소리가 없는 데다, 세월이 만들어준 청각장애자인 내가 보청기조차 끼우지 않았으니, 나의 기대는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던가, 그 시간 속에서 바래고 소멸해버린 '소리의 레이어 Layer'를 오늘의 봄눈에 겹쳐서 멋진 그림을 만들어보겠다는 건 어설픈 시도였고 환상이었다.
찬 기운과 함께 적막 속에 하얗게 비워진 세상이 낯설게 다가섰다. 여태 내가 보아오던 공간이 아니었다. 보이는 눈 세상처럼 내 머릿속도 하얗게 비워졌다. 그리스 신화에서 죽은 영혼이 건넌다는 다섯 강 중에 마지막인 망각의 강이라는 ‘레테’를 건너면 이런 느낌일까? 어둑새벽을 덮고 있는 눈은 모든 색과 기억을 단번에 지워버리고, 내 의식 세계에 생경한 언어들을 부어주었다.
내 기억을 제멋대로 지워버리고 흰색으로 칠해버린 봄눈이 날 깨우쳐 일러준 말은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쉼 없이 변한다.’이었다. 두텁지 않게 내린 봄눈은 해가 솟아올라오면 금세 녹아 흘러가고 원래의 모습과 색이 돋아날 터이다. 나는 어리석게도 드러나는 그 모양과 색조차도 시간 속에서 미세하게 변화하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라는 진리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눈에 보이는 건물과 길도 불과 10여 년 전에는 논밭이거나 과수원과 야산이었다. 눈이 내렸다가 녹기까지 시간은 겨우 몇 시간이고, 드러난 자동차나 집, 도로가 시간에 삭아 달라지거나, 또 다른 이유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 시간은 몇십 년, 백 년이 걸릴 수 있다고 해도 그 차이는 별거 아니다. 우주가 생성되어 지구가 생기고, 작은 미생물에서 진화한 인간이 오늘의 문명 세계를 이루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37억 년이라고 한다. 그 시간에 비하면 백 년 정도는 그야말로 순간에 불과하다.
불가佛家에서는 사람의 시간을 두고 수유須臾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 순간을 살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 하고, 이름 지어가며 따지고 미워하고, 죽는 순간까지 욕심을 채우지 못해 버둥거리다가 숨이 끊어진다. 봄눈이 내렸다가 해가 뜨면 금세 녹아 사라지듯, 그렇게 부질없는 삶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탐하였던가?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고 달라졌는지, 생각해보면 바로 엊그제인 듯하다.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쉼 없이 변한다는 평범한 이치도 몰랐고, 이 짧고 소중한 시간이 이름 없는 자투리로 변해 닳아 없어지는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짓을 하면서 즐겁게 살면 그게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사소한 재미에 빠져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좋은 가장 노릇도 하지 못했음을 늦게야 후회했지만, 그때는 이미 아내가 불치병으로 누워버린 뒤였다.
그 죄업罪業을 갚느라 15년을 오롯이 간병인으로 살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목에 튜브를 꽂아 숨을 쉬던 아내는 마음속에서 퍼 내버리고 싶었을 응어리진 말 한마디도 풀어내지 못했다. 그 많은 말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해 들끓는 가슴을 지니고 아내는 가뭇없이 갔다. 내게 남겨진 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먹먹하도록 치받아 나오는 미안함과 적막한 외로움뿐이다.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지만, 세상을 잘못 산 내게 추억이란 부끄러움이고 살가죽을 벗기는 듯 극심한 고통이다. 그 고통을 피하느라 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뭔가에 열중하여 일을 만들거나 운동을 하고, 할 게 없으면 웹서핑이라도 한다. 황금 같던 시기에는 눈에 보이는 허망한 가치에 목매어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데려다 줄 산 너머의 일에 무관심했고,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무서운 시간의 능력을 가볍게 알았던 죄로 이렇게 혼자 남아 삶도 죽음도 아닌, 어정쩡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가끔은 이런 나날의 하찮고 무가치함에 소스라쳐, 내게 매여 있는 가녀린 목숨 줄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스치기도 했다. 어설픈 삶을 꾸려가느라 버둥거릴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그마저도 ‘시간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는 핑계로 이렇게 시간에 떠밀려가고 있다.
다시 들을 수 없는 소리,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 뼛속 깊이 밴 외로움이 들추어낸 그리움의 화인火印이 내 가슴을 뜨겁게 지지고 태웠다. 다시 쓰라린 아픔이 지나갔다. 내가 찾아보고자 했던 소리의 레이어는 달라진 시간에서는 맞추어볼 수 없는 해묵은 버전 Version이었지 싶다. 자고 나면 변하는 시대에 살면서 묵은 버전의 추억을 뒤적거리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자,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쉼 없이 변하는 속에 살면서 같은 생각으로, 같은 방식으로 나날을 보낼 수는 없다. 지난날을 자꾸만 되돌아보며 자책하는 일도 이제는 그만 끝내야 한다. 시간의 물결에 몸을 맡기지 못하고 거스르는 일은 내 체력으로 무리다. 흐르는 물결에 버티려 하지 말고 바닥에서 발을 떼고 몸을 띄워 흘러가야겠다.
흘러가며 토끼 꼬리만큼이나 남은 내 시간의 의미를 알아보고 그 시간과 사귀며 저 문門이 열릴 때까지 땀나도록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