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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고운 Oct 05. 2022

개쑥갓


  재작년에 시작한 풀꽃 사랑이 올해도 나를 풀밭으로 끌어냈다. 지금쯤은 열병이 식어 시뜻할 만도 하건만, 아직도 틈만 나면 무거운 카메라를 짊어지고 나선다. 일찍 다가선 더위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땡볕을 마다하지 않고 들로 산으로 헤매는 이 아픈 사랑은 아마 세상을 뜰 때까지 식지 않을 듯하다. 사랑은 한결같아서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데, 내 풀꽃 사랑은 늘 새로워서 더 빠져드는 신세대 사랑이다. 

  올봄에 ‘변산바람꽃’이 내장산에 피었다는 소식에 아픈 허리를 무릅쓰고 달려갔다. 촬영에서 돌아와 사진을 열어 보기도 전에 허리에 극통이 찾아와 하마터면 수술할 뻔했다. 가까스로 통증을 수습하고 사진을 열어 변산에 핀 바람꽃과 내장산에 핀 바람꽃이 많이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풀꽃들은 피는 장소, 시기에 따라 조금씩 모양이 다르다. 그 작은 것들의 적응력은 놀랍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피고, 넘치면 넘치는 만큼 더 크고 짙게 핀다. 물이 가깝고 영양분이 많은 곳에는 봄꽃이 여름까지 피어 쉴 새 없이 씨앗을 만들어 퍼뜨린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풀꽃이다.


  민초(民草)라는 단어가 풀꽃에서 비롯한 건 아닐까. 그들을 보며 내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기도 했다. 치기(稚氣)와 만용(蠻勇)으로 그르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저 풀꽃들처럼 주변과 상황에 맞는 삶을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흐르는 시류에 몸을 맡기고 그냥 흐르는 대로 살았더라면 내 삶이 훨씬 부드러웠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하면서도, 그랬더라면 내 몸과 마음이 다 허물어져 지금쯤 어느 수목 아래에 한 줌 가루로 묻혀 흩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날 깨우치고 때로는 가르치는 스승이기도 한 풀꽃들이 가을에 들어가면서 보기 어렵다. 냇가로 밭 가장자리로 찾아다니며 기웃거리지만, 어쩌다 찾아낸 것들은 가을바람에 주눅이 들어 시들하거나 얼굴이 상해서 사진 감이 되지 못한다.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짊어지고 한나절 내내 헤맸다. 혹시라도 못 보던 풀꽃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근처 고등학교 옆을 지나는데 담장 밑 인도와 만나는 자리에 노란 꽃이 보여 자전거를 멈추었다. 꽃이 피어 있고 작은 솜방망이 꽃씨 모양으로 씨앗 날릴 준비를 마쳤다. 뽀리뱅이와 비슷한데, 잎은 쑥갓처럼 생겼다. 궁금해서 얼른 스마트폰으로 이름을 검색했다. ‘개쑥갓’이라고 했다. ‘개-’ 어쩌구 하는 이름을 가진 풀은 본디 풀에 비해 작거나 늦게 발견되어 이름 짓기가 애매한 풀이다. 또는 뽑아도 자꾸 나는 끈질긴 잡초다. 

  개쑥갓은 유럽 원산인 식물로 학명은 Senecio Vulgaris라고 한다. 진통효과가 있어서 한방과 민간에서 구주천리광(歐洲千里光)이라는 이름으로 줄기와 잎을 약재로 쓴다. 이 풀은 민들레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내가 본 곳도 시멘트 틈새에 다른 식물은 전혀 없는데 이 개쑥갓만 담장 밑을 따라 줄줄이 피어 꽃씨를 날리거나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쑥갓 냄새와 비슷하지만, 꽃 모양은 쑥갓과 전혀 다르다. 물론 씨앗 모양이나 퍼뜨리는 방식도 다르다.


  아무리 척박한 자리에서도 새벽이슬을 머금어 잘 자라는 생명력, 많은 씨앗을 날려 자손을 퍼뜨리는 번식력은 우리 노인 세대를 닮았다. 일제의 핍박이 가장 심하던 시대에 태어나 송기(松肌 : 소나무 속 껍질)를 벗겨 먹어야 했던 어머니들이 제대로 젖을 내지 못해 젖배를 곯았던 이들이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 한국전쟁을 치렀고 독재 시대에 사회에 발을 딛으며 갈등했다. 개쑥갓처럼 아무것도 없는 터를 일구어 가정을 건사하고 자식들을 키워내 오늘의 번영에 한 축이 되었다. 

  힘든 세상을 견뎌 비로소 살만해졌다 싶은데 세상은 이들 세대를 벌써 밀어냈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아직도 지난 시대에 잘 나가던 추억으로 꿈에서 위로받으며 산다. 어디에도 낄 자리가 없고 내 돈을 내고 밥을 먹으러 가도 구석 자리에 안내받는다.


  개쑥갓처럼 끈질기게 앙버티며 살아오던 힘도 세월에 다 빼앗겼다. 어쩌다 보여주는 손자들의 반가운 재롱에 속주머니를 털어 바쳐도 자주 볼 수 없어 늘 허기진다. 심심찮게 손자들과 영상 통화하는 친구를 늘 부러워하며 “영상통화 비싸다던데….” 혼자 푸념하며 노인복지관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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