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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고운 Jun 17. 2022

풀꽃이 '네 형편대로 살라'하네

작은 풀꽃처럼 살아가는 지혜를 조금 깨닫는 동안 봄이 무르익었다

봄이다. 

복수초, 바람꽃, 노루귀가 다투어 피고 큰 개불알꽃은 언덕마다, 공원 굽이마다 지천이다. 홍매 청매가 피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부지런한 벌들은 꿀을 따느라 부산하다.


날씨는 포근하여 겨울옷을 벗어던진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이 좋은 계절인데 나는 방구석 1열을 떠나지 못했다. 조금 걸으면 발목과 무릎 언저리가 쏙쏙 아렸다.


잠시 서 있어도 통증이 쏠리듯 심해져서 얼른 자리에 누워야 조금 편했다. 벌써 이런 통증으로 20여 일째 고생했다. 병원을 찾아 치료해보았지만, 다음 날이면 고통이 찾아왔다. 그러다가 며칠 통증이 줄어 그런대로 활동할 만했다. 



하필 그때 내장산 국립공원에 변산바람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변산바람꽃이 내장산에 피다니….


정읍에 연락하여 장소를 알아내고 지인 2명과 함께 내장산으로 달렸다. 600여 미터 거리를 안내하는 국립공원 직원을 따라 부지런히 걸어가 마침내 변산바람꽃을 만났다. 고즈넉한 골짜기 볕 바른 자리에 옹기종기 핀 바람꽃들은 올해 내가 만난 첫 봄꽃 이어서인지 더욱 예뻐 보였다.


삼각대를 낮추 세우고 땅바닥에 엎드려 수동 렌즈의 핀트를 맞추어 들여다본 변산바람꽃은 청초한 봄의 요정 같았다. 내가 아는 변산바람꽃보다 키가 조금 작고 가냘프게 보였다. 그리고 꽃의 암술이 5~6개 정도였다.


원래 변산바람꽃은 꽃대 색이 진하고 암 꽃술이 촘촘히 붙어 15개 이상인데 내장산의 바람꽃은 암 꽃술이 1/3 수준이고 수술도 많지 않았다. 어쩌면 새로운 종류로 변이가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작은 풀꽃을 촬영하면서 그 작은 꽃들이 기가 막히게 환경에 적응하여 얼마든지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는 걸 발견했다. 꽃이 작아진 것도 척박한 환경에 맞추어 사느라 진화를 거듭한 것이라고 한다. 내장산의 변산바람꽃도 그렇게 진화하며 키가 작고 여린 꽃을 피우게 되고 꽃술도 적은 꽃이 되었나 싶다. 견딜 수 있을 만큼 알맞게 몸을 줄이고 꽃술도 줄이는 생존력을 잘 보여주는 꽃이었다. 봄꽃들은 그렇게 척박한 봄을 잘 견디도록 적응하며 내게 예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지난해부터 그들 작은 세계를 들여다보며 그 아기자기함에 푹 빠졌다. 좁쌀만 한 꽃에는 그 꽃 크기에 맞는 벌이 날아든다. 맨눈으로는 식별조차 불가능한 작은 벌이 2~3㎜ 크기의 꽃에 파고 들어가 꿀을 따면서 수정하는 광경을 매크로 렌즈를 통해 보면서 몇 번이나 감탄했다.


그토록 작은 벌이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면 말벌 모양을 그대로 닮았고, 꿀벌 모양을 한 것도 있다. 작은 꽃에 드나들 수 있게 적응한 것일까? 아니면 작은 꽃을 위한 조물주의 안배일까?



통증이 우선한 틈에 변산바람꽃을 촬영할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그 행복에 따른 시련은 가혹했다. 다음 날 아침에 침대에서 내려오던 나는 극렬한 통증에 그대로 바닥에 구르면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카메라와 삼각대, 렌즈 등 장비가 조금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짊어지고 젊은 직원의 발걸음을 따라가느라 무리가 되었던지, 아니면 엎드리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신경을 건드렸던지 모르지만, 내게 가해지는 통증은 사람이 참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극통이었다.


병원에 기다시피 찾아가 통증을 줄이는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의사는 척추 수술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권했지만, 수술 후에 고생하는 친구들을 보아 온 터라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러다가 추나요법을 잘하는 이를 찾아가 교정을 시작했다.



엉덩이 근육이 틀어지고 좌골까지 비뚤어진 허리를 바로잡고 엉덩이 균형을 맞추면서 통증이 점점 줄고 있다. 현상에서 주사로 통증을 줄이는 임시 치료가 아니라 운동을 통해 몸을 바로 세우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10여 일 동안 틀어진 엉덩이를 바로 잡으면서 구부정한 몸매가 반듯해지고 걸음새도 편해졌다. 허리로부터 이어지는 통증이 없어졌다.


한 달 남짓 통증으로 고생하면서 내가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풀꽃들이 그처럼 환경에 맞추어 몸을 줄여가며 살아가는 걸 보면서 나는 아직도 세월에 허물어진 주제를 모르고 설치다가 모진 고생을 했으니 말이다. 작은 풀꽃처럼 살아가는 지혜를 조금 깨닫는 동안 봄이 무르익었다. 매화가 피고 벚꽃, 영산홍 꽃망울이 봉긋하다.


풀꽃을 보며 형편대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 올봄이다. 그리운 봄꽃들을 다시 못 만날까 조바심하던 마음에 따스한 볕이 들어와 희망이 한가득이다. 이제 주말에는 다시 카메라를 메고 그 예쁜 꽃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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