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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튼튼한 토마토 Apr 09. 2021

난 우울한 날에는 손이 많이 가는 튀김을 만들지

스스로를 우울한 사람이라도 단정 짖는 일은 위험하다. 우울하고 염세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사람이라는 수식어들은 오랜 시간 나를 대표하는 단어였다. 그림자처럼 늘 날 따라다니는 그 단어는 내 인생 전반을 집어삼켰다. 수많은 이유들이 슬픔의 씨앗이 되었다.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슬픔과 우울은 활짝 핀 봄날의 꽃들과 같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울은 오래된 연인처럼 나를 깊게 이해해 주는 것 같았지만 그건 내 잔인한 착각이었다. 이유도 없이 우울한 날들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 잠에 드는 일. 그 정도의 에너지밖에 남지 않은 날이 있다. 울기 위해서 슬픈 영화를 몇 번이나 찾아보고, 분노를 쏟아내기 위해서 자극적인 기사를 찾아본다. 하지만 그런 날일수록 몸을 일으켜 작은 성취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 있어서 요리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방법으로 소리 없이 찾아온 우울을 떨쳐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꽤 오래전이다. 집중해서 재료를 다듬고 썰고 볶는 일련의 과정들이 머리를 개운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우울한 날이면 가능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들곤 한다. 언제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서 스크랩해두었던 레시피를 찾아 만들거나 좋아하지만 귀찮아서 자주 만들지 않았던 음식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튀김은 이보다 더 적합할 수 없다. 집에서 튀김을 만들면 치우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만 깨끗한 기름에서 튀긴 튀김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평소에는 단점을 극복하기 힘들어 볶거나 삶는 방식을 선호 하지만 용기를 내서 튀김을 만들기로 한다.


닭날개를 레몬즙, 소금, 후추에 버무리고 밀가루, 베이킹파우더, 감자전분, 파프리카 가루, 양파 가루와 적당히 섞는다. 기름에 10분 튀기고 10분 레스팅을 하고 다시 2분을 튀기면 치킨윙이 탄생한다. 양념은 녹인 버터와 핫소스를 섞어 간단하게 만들어주면 깜작 놀랄 만큼 맛있는 버펄로윙을 맛볼 수 있다. 튀김은 늘 뒤처리가 힘들어 한숨이 나오지만 갓 튀겨진 닭을 맛보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사 먹는 치킨이 제일 간단하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집에서 튀김을 만들어 먹겠는가. 우울이 삶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부지런히 손을 움직인 자신이 대견하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행복하게 튀김을 먹는다. 맛있는 성취감이 우울을 잠재운다. 그래서 나는 우울한 날에는 손이 많이 가는 튀김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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