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호사K Oct 21. 2023

수술실의 방장과 액팅

경험과 에너지를 함께 나누며 일하고 익히는 법 


오늘은 다른 과에 있는 동기랑 그 방 방장 선생님이 지나가시길래, 방장 선생님께는 인사드리고 동기에게는 인사했더니 선생님이 놀라며 웃으신다. 


"(동기에게) 너희 둘이 동기야??? 너를 애기로만 봤는데...."


연차는 낮아도 성숙한 얼굴이 이럴 때 빛을 발한다. 방이 다른 분들보다 자주 바껴도, 방장 업무를 계속 하고 있으니 나를 연차가 제법 되는 걸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2020년에 처음 수술방의 방장 업무를 맡았다. 우리 병원 수술실 데이 번은 각 방별로 방장과 액팅 2명이 근무한다. 그래서 수간호사 아래 각 과의 차지간호사가 있고, 과에 속한 방장/액팅 별 데이 간호사, 11A 간호사, 이브닝 간호사가 있으며 달마다 듀티가 바뀐다. 그래서 보통은 고연차가 방장, 저연차가 액팅을 하며 서로 경험과 에너지를 보완해가며 일을 한다. 



나는 상대적으로 같은 과에 오랫동안 있었고 내가 속한 수술 과의 확장으로 저연차임에도 방장 업무를 맡게 된 것이라 특수한 상황이었다. 방장이라고 돈을 더 주거나 직급 차이가 있지는 않고, 소독간호사 업무와 순회간호사 업무를 하는 것은 액팅과 같은데 업무 가중이 있다. 방장 카운트, 방의 일에 대한 상급자 보고와 책임, 계속 바뀌는 액팅에 대한 수술 트레이닝, 각종 물품 청구와 기구 수리, 침대 부속이나 방 장비 관리 같은 일들 말이다.


이례적으로 3년차 때 처음 방장을 맡았을 때, 동기들이 놀리듯이 "오오~~ 벌써 방장이야."했다. 왜냐하면 수술실 배정이 적은 마이너 과를 로테이션하는 동기들은 로테이션을 자주하므로 액팅 역할을 하며 트레이닝의 연속이고, 세분화 파트가 많고 수술방 배정도 많은 메이저 과(GS,NS,OS 등)의 동기들은 고연차 선생님들이 많기에 방장을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내 동기는 신경외과였고 메인 방 방장을 했었는데 "나는 바지방장(바지사장처럼)인걸. 우리과는 차지 선생님이 우리 방 앞에 계속 있으시니까."라고 했다. 동기들 중에 나와 비슷한 경우 -거의 비슷한 과, 수술도 자주 넘어오는 진료과에 소속되는 경우- 가 없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당시 차지 선생님은 새로 방을 배정받아 여러 진료과의 수술을 익히고 틀을 만들어야하는 방에 나와 동기를 배정해주셨고, 그렇게 나는 방장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어린 우리들이 배움과 적응이 빠를 것이라 기대하셨다. 부담스럽고 놀랍기도 했지만 '잠깐 하는 거겠지, 잘 인계받고 전해드려야지.' 하며 스스로 위안했다. 방에서 일어난 기구 수리, 장비 고장수리 이력, 방에서 관리하는 교수별 샘플 진료재료, 랜딩 진료 재료 등 업무 디테일은 방장 업무 파일을 만들어 기록을 남겼다. 



접해보지 못한 낯선 수술을 하면서도 의지할 상대가 나랑 동기 뿐이라 때로 좌절하거나 당황하기도 했다. 도전적인 업무가 지속되며, 근무를 마치면 체력과 집중력이 소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번아웃 수준의 나날이 이어졌다. 하루는 잠을 자려고 하는데 심장이 뛰어 잠이 안 왔고, 가만히 누워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내가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부담감을 가지고 있고, 힘들어하고 있었구나. 힘들었구나…’  



그래도 그 시간 또한 흐르기 마련이었다. 직접 부딪쳐가며 다양한 진료과의 수술을 공부하며 익히고 해낼 수 있게 되어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덜었다. 기본이 단단하면 응용을 할 수 있으니, 비슷한 동류의 수술이 들어와도 어떤 점이 중요한지 인계의 포인트를 생각하고 걱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낯선 수술도 수술이지만 방장 업무와 관련해 경험하지 못해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주변 방장 선생님들, 고연차 선생님들, 차지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며 부딪쳐가며 익혔다. 임상에서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주변 선생님들께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감사를 표했다. 선임 선생님들의 경험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존중하며 배우고, 방장으로서 다양한 일을 경험해보며 수술실의 일을 보는 눈도 넓어졌다. 



늘 힘이 되던 동기들임을 알았지만 ‘동기 덕분에’ 내가 직장 생활을 수월히 해내고 있음을 다시금 실감한 시절이기도 했다. 함께 데이를 했던 나랑 동기는 서로에 대한 신뢰 아래 역할 분담을 상호보완적으로 협동하며 해냈다. 내가 방 셋팅을 헷갈려하면 말없이 가서 고쳐주고, 좀 부족한 인계를 줘도 "네가 했으면 다 맞지~" 하며 응원과 지지를 보내던 동기. 그 과에 처음 발령받아 나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던 동기가 많이 배려해주고 신경써줬기에 이만큼 커서 지금도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처음에는 예민한 의사들 때문에 두려움이 있었다. 의사들도 고연차 선생님들이 계시는지 여부에 따라서 언행이 달라지는 분들이 있다. 경험이 적고 신규 같으면 얕보고, 아는 사람 불러오라 짜증내고, 사정이 있어서 생기는 딜레이에도 간호사가 몰라서 그렇다는 듯 타박하거나 인계도 안 받느냐며 성질낸다. 이런 상황을 숱하게 봐왔기 때문에 동기랑 둘이 근무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가장 걱정했던 교수님이 생각보다 무난히 우리를 대해주었고 예의를 지켰다. 이름을 불러가며 친근히 대해주는 교수님은 "오~ OO샘이 방장이에요?"하며 방에 들어오며 반갑게 웃기도 하셨다. 격려해주시는 전담간호사 선생님이나 우리의 경험 혹은 실력을 존중해주는 펠로우 선생님도 있었다. "나이가 어리신데도 방장 하시는 거 보면 신임이 대단하신가봐요."라며.


그렇게 시작한 방장을,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인계를 받고 짧게 짧게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완전 신규를 가르치거나 프리셉터를 받기에도, 로테이션한 고연차 선생님들을 가르치며 함께 일하기에도 연차가 낮으면 곤란하기에 한 방에서 방장을 오래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새로 로테이션하는 고연차 선생님을 저연차 방장과 짝꿍 지어주면 트러블이 생기기 십상이다. 저연차더라도 방장 업무로 신경쓰고 하는 일이 많은데, 고연차 선생님 눈치 맞춰가며 일을 해야하고 뭔가를 가르칠 때에도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말을 해야한다. 



'얘가 이런 것까지 가르치더라. 얘가 이런 걸 가르치더라. 얘가 이런 걸 안하더라.' 나도 그 시간대에 방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느라, 하지 않았던 액팅 일을 고연차 선생님이 하다가, "너는 내가 할 때까지 기다리니?" 말하기까지. 일도 바쁜데 눈치도 보고, 그래도 방의 일에 대한 책임은 방장이라고 내가 지며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경험 욕심이 많았던 나지만, 지금 수술장에서는 잘 모르겠다. 승진이나 직무 이동은 요원한 일인데 직장에서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찍 방장을 시작해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부담되고 힘든 점도 많았다. 적당히 능력을 숨기고, 모르는 척하면 편하게 일을 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물론 뒤에서 욕먹을 수는 있지만 내 일상 생활의 질과 안위가 달려있는 문제니까 아주 공감하는 처세술이다. 나도 다른 과로 로테이션하면 다시 액팅 일을 익히는 순번으로 돌아간다. 지금도 그 때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해내게 될 것이다. 돌고도는 끝이 없는 수술 공부 속에서 말이다.



이전 04화 수술방 식구들의 개성 표현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