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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글 쓰는 여성: 2. 로리를 거절한 조의 미래

영화 '작은 아씨들'(2019)의 독신 작가 조 마치

1. 작가가 된 (노)처녀     


여자에게 있어서 결혼하는 것과 작가가 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일일까? 이 멍청한 질문에 대하여 현대인은 당연히 ‘두 가지 다 할 수 있지!’라고 외칠 것이다. 요즘 여성들은 직장도 다니고 살림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 데 글 하나 못 쓸 것이냐!     


2019년 영화 ‘작은 아씨들’을 보면 그런데 이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아는 말괄량이 조 마치는 깜찍하게도 자신의 결혼을 자전적 소설 ‘작은 아씨들’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은 독신으로 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조의 결혼은 상상 속의 장면이며 현실에서 그녀는 출판 편집장과의 거래 때문에, 즉 여주인공이 독신으로 남는 것을 원치 않는 독자들의 기대 때문에 작중 여주인공 조 마치를 결혼시켜 버리는 것이다.

 

학문적인 용어로 상호텍스트성(주: 한 텍스트의 기존 텍스트와의 연관성)이라고 부르는, 간단히 말해서 ‘작품 속에 작품 끼워넣기’는 2019년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독특한 효과를 가져오는데, 영화 속 조 마치가 그녀의 소설 속 등장인물 조 마치와 겹치면서 영화가 (원작)소설을 가리키고 소설이 영화화된 텍스트를 가리키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독신으로 남은 조 마치는 무엇을 하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인쇄소에 찾아가서 자전적 소설 ‘작은 아씨들’이 제작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식자공이 작은 활자를 배열해서 종이에 글자를 인쇄하고 그 종이들을 모아서 실로 꿰매고 압축한 뒤 가죽 장정을 씌우고 금박 씰을 찍어서 책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말이다.

  

즉 2019년 영화 ‘작은 아씨들’은, 영화 자체가 소설 작은 아씨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메타픽션 metafiction으로서, 허구가 허구를 만들어 내고 그것들 사이에 원본과 사본의 층위가 사라지는 상호텍스트성을 보여준다.

 

2. 로맨스 뒤집기


조 마치가 결혼 대신 작가를 선택한 것은 또한 로맨스 뒤집기이기도 하다.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조는 로리(시어도어 로렌스)를 좋아하면서도 끝끝내 그의 청혼을 거부하며, 존 베어 교수와의 관계에서도 낭만적인 이끌림보다는 글쓰기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다가 다투고 결국 도움을 받는 동지애를 보여준다 (1994년 '작은 아씨들' 영화에서는 나이 지긋한 베어 교수와 조의 관계를 마치 선생님과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 학생처럼 그렸다).

     

대부분의 20대 초반 아가씨들이 결혼에 대해서 그다지 필요성을 못 느끼기는 하지만 2019년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조는 단순히 철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유와 헌신과의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듯이 보인다.


조: 테디(주: 로리의 별칭). 난 결혼은 안 할 것 같아. 난 이대로의 내가 좋아. 서둘러 포기하기엔 이 자유가 너무 좋아.     


로리가 낭만적인 사랑을 고백하며 프로포즈할 때 조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조: 넌 좋은 사람이야. 내겐 너무 과분해. 정말 고맙고 네가 자랑스러운데, 널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로리: 사랑할 수 없다고?
조: 테디. 잘 들어봐. 넌 사랑스럽고 교양있는 여자를 만나서 사랑받으며 살아갈 거야. 그 여자는 좋은 집에서 좋은 아내가 돼주겠지만, 난 못해.
로리: 할 수 있어.
조: 날 봐! 난 촌스럽고 어설프고 별나.
로리: 사랑해, 조.
조: 넌 날 창피해할 거야.
로리: 사랑해, 조.
조: 그리고 싸우겠지, 지금도 싸우고 있잖아. 나는 사교계를 싫어하고 넌 내 글이 싫어져서 둘 다 불행해질 거야. 그럼 결혼을 후회하고 인생이 끔찍해질 거야.


조는 로맨스보다는 아주 현실적인 측면에서 결혼에 접근하고 있으며(로리는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를 뒷바라지 하면서 사교계 생활을 같이할 아내가 필요하다. 반면 조는 털털하고 남의 이목에 신경 쓰는 것을 싫어하며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로리와 같이 지낼 때 죽이 잘 맞지만 자라 온 배경과 취향이 아주 다른 두 사람이 결혼 후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음을 간파하고 있다. 결혼은 로맨스가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

    

3. 또 다른 주인공 에이미     


조와 함께 영화 ‘작은 아씨들’의 또 다른 주인공은 막내 에이미 마치이다. 에이미는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자신의 화실을 찾아온 로리에게 “결혼은 경제적 거래”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그녀는 언뜻 보기에 속물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사실 그녀는 언니 조를 사랑하는 로리를 짝사랑하고 있던 터라 질투심을 감췄을 뿐이다. 에이미는 결국 로리보다 훨씬 부자인 프레드 본을 거절하고 로리를 선택하며 이러한 에이미의 결혼은 로맨스와 현실적 필요를 모두 만족시킨 현명한 결정이라 할 수 있다.


4. 21세기 영화가 그려낸 19세기의 한계     


영화 ‘작은 아씨들’의 배경은 19세기이다. 여성의 권리가 제한되었으며 독립적인 직업인으로서보다 ‘집안의 천사’, 즉 헌신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던 시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에 대한 기대는 21세기가 되었어도 많이 변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집안일도 잘하고 밖에 나가서는 직장 일도 잘하는 수퍼우먼이 되어야 한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시청자들에게 열린 결말을 제시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서는 조가 독신 작가로 남는 결말로 보이지만, 조가 소설 속에서 그려낸 행복한 결혼과 가족들과 함께 플럼필드 학교를 이끌어가는 모습 역시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실은 차가운 블루톤의 화면으로 처리했고 과거 또는 판타지는 따뜻한 주황톤의 화면으로 처리했다.)

     

5. 자기만의 방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가난한 베어 교수와 결혼했더라면 조는 과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베어 교수의 재산이 문제가 아니라 살림에 파묻힌 그녀에게 과연 글을 쓸 시간적 자유와 정신적 여유가 허용되었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란 수필에서 여성이 작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독립적인 공간과 연수입 500파운드라는 경제적 자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로리가 되었건 베어 교수가 되었건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그녀의 창의적인 사고를 억압했을지도 모른다. 독신으로 남은 조의 선택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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