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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글 쓰는 여성: 5. 문학도 숙녀의 일입니다

영화 '보이지 않게 걷기'(2016)와 브론테 자매의 중성, 남성 필명

1. 보이지 않게 걷다


‘오만과 편견’과 함께 세계문학전집의 단골작품으로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이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이 내용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이 소설들은 각각 여성주의 소설의 원형이자 열정적 로맨스의 대표작으로 널리 인정된다.


한국에서는 개봉되지 않은 영화 ‘보이지 않게 걷기 To Walk Invisible’는 자매이면서 각각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의 저자인 샬럿과 에밀리, 그리고 그보다는 덜 알려진 ‘아그네스 그레이’의 저자인 막내 앤의 작가적 성장을 살펴본 영화이다.


우리는 언뜻 생각하기에 문학성을 타고난 브론테 자매가 우호적인 환경에서 천재적인 작품들을 써냈으리라 여기기 쉽다. 그런데 영화에 나타난 세 자매의 삶은 가난하고, 형제인 브랜웰의 알콜중독에 시달리며, 여성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척박한 환경에서 말 그대로 ‘보이지 않게 걸어가며’ 작품을 산출한 것으로 그려진다.

     

2. 문학은 숙녀의 일이 아니다!     


현대는 상황이 달라졌지만 19세기만 해도 선진국이었던 영국에서조차 여성은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열등하게 여겨졌고 가질 수 있는 직업도 가정교사나 학교 교사 정도가 다였다. 문학계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해서 문학, 특히 시는 여성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영화에서 샬럿이 지적한 것처럼 계관시인 로버트 사우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문학은 여성의 직업이 될 수 없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숙녀는 장식적인 재능으로 치장된 교육과 결혼에 만족해야 합니다.”

     

다른 분야도 아닌 같은 문학계 남성이 이같이 편견에 찬 시각을 갖고 있으니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이러한 여성작가에 대한 편견에 대하여 세 자매는 굽히지 않는 반응을 보여준다. 샬럿은 출간 작가의 야망을 갖고 좌절감 속에서도 끊임없이 글쓰기를 시도하며, 에밀리는 근처 황야를 돌아다니며 자연과의 영적 교감 속에서 시적 감흥을 얻는다. 앤 역시 글을 쓸 때만 살아있고 행복한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3. 익명 또는 남성, 중성 필명 사용하기      


브론테 자매가 처한 상황은 단지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지 못함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한정상속 때문에 생활의 터전 자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있다. 한정상속은 아들에게만 재산을 상속하는 제도인데 유일한 형제인 브랜웰이 알콜중독에 빠져 있으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유일한 재산인 집이 교회 이사회로 넘어갈 판이다.


그리하여 브론테 자매는 각자가 쓴 시를 모아서 시집을 출판하기로 결의한다. 그들은 또한 소설을 한 편씩 출간하는데, 앤은 가정교사 체험을 ‘아그네스 그레이’로, 에밀리는 우연히 들은 두 가문의 얽히고설킨 애증담을 ‘폭풍의 언덕’으로 집필한다. 샬럿 역시 쓰고 있었던 원고를 손봐서 ‘교수’를 출간한다.

      

브론테 자매는 그러나 시집과 소설의 출판에 있어서 실명을 사용하지 않는다. 에밀리가 영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자가 글을 쓰면 내용으로 판단 받지만, 여자가 글을 쓰면 성별로 판단 당하”기에 가명을 쓰기로 한다. 그리하여 샬럿, 에밀리, 앤은 각자 커러, 엘리스, 액턴이라는 중성적이거나 남성적인 필명을 사용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많은 여성들이 익명이나 남성, 중성 필명으로 글을 출판했다.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은 생전에 익명으로 출판했고 ‘플로스강의 물방앗간’의 저자인 메리 앤 에반스는 조지 엘리엇이라는 남성 필명을 사용했다. 쇼팽의 연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아망딘 오로르 뒤팽은 조르주 상드라는 남성 필명으로 활동했으며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출판할 때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서문을 달고 익명으로 출판했다. 여성 작가가 익명이나 남성, 중성 필명을 사용한 것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거나 여성의 출판이 자랑스러운 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작품의 내용보다는 작가의 여성성에 주목해서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려 하지 않는 문단과 대중의 편견 때문에 생겨난 방어적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출판 시도는 쉽지 않았다. 커러, 엘리스, 그리고 액턴 벨의 필명으로 쓰인 원고는 간신히 토마스 커틀리 뉴비라는 출판인을 만났는데 뉴비는 선입금을 받고서도 출간을 계속 미뤘으며 원고 교정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뉴비는 커러 벨의 ‘제인 에어’가 성공하자 커러, 엘리스, 액턴이 동일 인물이라 주장하며 앤의 두 번째 소설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을 커러의 작품이라고 속이고 미국 출판사에 팔려고 한다. 이 사건은 샬럿과 앤이 런던을 직접 방문하여 자신들이 소설의 원저자임을 밝힘으로써 일단락된다.

      

4. 불행한 캐릭터 브랜웰     


영화 '보이지 않게 걷기'에서 브랜웰은 불행한 캐릭터이다. 그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예술적 재능을 가졌지만 이를 꽃피우지 못하고 알콜중독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랜웰의 비중은 브론테 자매 못지않게 큰데, 세 자매가 모두 그의 캐릭터를 일정 부분 반영한 ‘바이론적 영웅’을 소설에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의 에드워드 로체스터 경,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스, 그리고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의 알콜중독 남편은 모두 브랜웰의 어두운 측면을 담고 있다.

     

결론적으로 브론테 자매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성차별적 출판 관행에 관해서 알기 원하는 독자에게는 영화 ‘보이지 않게 걷기’의 시청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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