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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글 쓰는 여성: 3. 글 쓴다고 유세한다고?

영화 '디 아워스'(2002)의 조울증 작가 버지니아 울프

1.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 하면 책은 안 읽었어도 이름은 누구나 한 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그녀의 생애는 다소 낭만적으로 잘못 인식되어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 등장하기도 했고,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유명한 연극도 있다.    

  

다소 마르고 긴 외양에 지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는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소설가로 영화 ‘디 아워스’는 그녀의 대표작인 ‘댈러웨이 부인’의 초고 제목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깐 모더니스트 소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넘어가자. 소설에서의 모더니즘은 등장인물, 사건, 배경 등을 리얼하게 그리려고 노력하던 사실주의 소설의 전통에서 벗어나 등장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을 포착하려 한 소설을 말한다.

      

영화 '디 아워스'는 댈러웨이 부인과 관련된 세 여성의 삶을 교차편집한다. 첫 번째 여성은 버지니아 울프로 1923년 영국에 살고 있다. 두 번째 여성은 로라 브라운으로 1951년 미국에 살고 있다. 세 번째는 델러웨이 부인처럼 꽃을 사고 파티를 준비 중인, 2001년 뉴욕에 살고 있는 클래리사 본이다.   

   

2. 글 쓰는 여성 울프


울프는 남편의 보살핌(울프는 구속이라 여기지만) 하에 요양을 하면서 ‘댈러웨이 부인’을 쓰고 있다. 그런데 울프는 굉장히 불안정해 보인다. 멍한 표정으로 줄담배를 피우고 펜대로 잉크병을 신경질적으로 두들기며 코앞에 사람을 앉혀두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한다. 울프는 온종일 소설 생각을 하면서 소설 속 주인공을 죽일지 말지 뭐 그런 상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그녀는 또한 안주인이면서도 식사나 살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서 하녀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울프가 실제로 글쓰기에만 올인해서 이렇듯 현실감각 제로였는지에 대해서 여기서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전기적 사실을 보면 울프는 신경쇠약과 우울증, 조울증에 시달렸으며(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글까지 쓰려니 아마도 정서적으로 위태로운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요되는 정신노동이기 때문이다.

     

다만 ‘집안의 천사 죽이기’(2022, 최애리 역)를 비롯한 울프의 산문집들을 읽어보면 그녀가 우울증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문학계의 성차별에 대해서 명료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노동, 정치 등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을 피력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영화에서 정신질환자로 그려진 부분은 울프의 면모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3. 모성 신화 해체하기


‘디 아워스’의 두 번째 주인공은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즐겨 읽는 전업주부 로라 브라운이다. 로라는 참전용사인 남편과 어린 아들과 살고 있으며 둘째를 임신한 상태이다.


그런데 로라는 가정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남편 생일날 아침 식사를 차리기보다는 ‘댈러웨이 부인’을 먼저 집어 들며 생일 케이크를 만들 때도 실수를 연발한다. 로라가 아들을 바라보는 눈길 역시 애처롭지만 차갑다. 수면제와 ‘댈러웨이 부인’을 챙긴 로라는 울며 매달리는 아들을 이웃에 맡기고 도심의 호텔로 일탈을 감행한다. 가출하는 로라의 머릿속은 복잡해 보인다. 아들을 내팽개치고 나온 죄책감, 생일 파티를 여는 아내를 기다릴 남편에 대한 미안함, 가정을 버렸다고 자신을 비난할 이웃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답답하기만 한 결혼 생활... 호텔방에 투숙한 로라는 수면제를 집어들고 자살을 감행하려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꾼다. 집으로 돌아온 로라는 생일상을 차리고 가족과 함께 케이크를 자르면서 행복한 집안의 천사를 연기한다. 그러나 그녀는 둘째가 태어난 뒤 정말로 가정을 버리고 떠난다.

 

일반적인 도덕적 잣대로 보았을 때 엄마가 가정과 아이를 버리는 행동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아이는 엄마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아주 고전적인 이슈인 모성 신화와 여성의 독립에의 갈망 사이의 갈등을 읽을 수 있다. 안정된 결혼 생활로도 남편과 자녀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여성의 독립적인 정체성과 자아실현에의 욕구 말이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건 결코 아니면서도 육아와 살림이라는 족쇄에 속박되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로라의 에피소드는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이야기가 아니던가.


4. 여성 동성애자 클래리사 본


클래리사에 관해서는 솔직히 별로 할 이야기가 없긴 하지만 성소수자에 관대한(아니 어쩌면 힙하게 여기는) 현대 뉴욕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디 아워스’는 여성의 글쓰기, 그리고 모성 신화와 여성의 독립적인 자아실현 욕구와의 갈등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한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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