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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글 쓰는 여성: 8. 죽어서 전설이 되다

영화 '실비아'(2003)의 우울증 시인 실비아 플라스

1. 죽어서 전설이 된 시인


죽음에는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플라스의 죽음은 도저히 잊히지 않는 극도로 파괴적인 형태의 죽음이다.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고 자살했기 때문이다. 플라스가 죽음을 택했을 때 그녀의 나이 갓 서른의, 두 아이를 둔 엄마였다. 아이를 둔 여성은 웬만한 역경에도 강해지기 마련인데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생각해보라) 그녀는 무슨 사연으로 그렇게 잔혹한 죽음을 선택했을까?

     

2. 플라스의 교육과 결혼     


실비아 플라스는 보스턴에서 독일계 이민자인 생물학 교수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과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여성 사립대학 스미스 대학에 다니면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플라스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서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여성대학 중 하나인 뉴넘 대학에서도 수학했는데 이때 나중에 영국 계관시인이 된 테드 휴즈를 만난다. 두 사람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지며 결혼했다.

  

영화 ‘실비아’는 플라스가 휴즈와 만나는 1956년 캠브리지 대학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플라스는 휴즈의 시를 읽고 그가 뛰어난 시인임을 알아차리며 휴즈는 그녀의 신선한 아름다움에 반한다. 아마도 휴즈는 시를 이해하는, 말이 통하는 여자를 만났다는 즐거움이 있었을 것이며 플라스는 자신이 우러르던 지성의 소유자를 차지했다는 기쁨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 후 두 사람은 아이를 낳고 현실에 발붙이고 먹고 살아 나가는데 큰 난관에 봉착한다. 특히 육아와 살림, 게다가 교편을 잡으면서 돈까지 벌던 플라스는 우울증이 깊어지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살림과 육아로 정신적 여유를 잃고 시 쓰기는커녕 우울증까지 걸린 플라스와는 대조적으로 휴즈는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으며 외도까지 하는데... 불면증과 착란,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플라스는 결국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고 자살한다.     


3. 고백시 Confessional poetry    


플라스의 시는 극도로 사적이며 고백적이다. 그녀는 자신을 가면으로 가리거나 자신 또는 작중 화자와 거리를 두는 데 익숙지 않아 보인다. 플라스의 대표작인 ‘아빠’를 읽으면 이 아빠가 그녀를 가부장적으로 억압하고 어렸을 때 죽은 생부 오토 플라스인 것이 드러나며, ‘나사로 부인’ 역시 플라스의 신경쇠약과 자살 시도를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삶을 소재로 자신의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트라우마나 성性, 정신질환 등 사회적 터부를 드러내는 이러한 고백시는 그러나 우울하고 어두운 경우가 많은데, 이재룡은 산문집 ‘꿀벌의 언어’(2007)에서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람 가운데 시인이 20%나 된다는 통계”가 있으며 “세계 명작을 읽는 독서행위는 남의 우울증에 동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4. 섬세한 감성과 정신적 고통


밝음보다는 어두움이 주조인 문학 작품들을 접하다 보면 이재룡의 의견에 동감하며 끄덕이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플라스의 시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녀의 시는 매우 섬세하고 우울하며 고통에 침잠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플라스의 시 '튤립'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튤립을 묘사하며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 tulips are too red in the first place, they hurt me.
Even through the gift paper I could hear them breathe
Lightly, through their white swaddlings, like an awful baby.
Their redness talks to my wound, it corresponds.
They are subtle: they seem to float, though they weigh me down,
Upsetting me with their sudden tongues and their colour,
A dozen red lead sinkers round my neck.


튤립은 무엇보다도 너무 빨갛다. 나를 아프게 한다.
포장지를 통해서도, 나는 튤립이 하얀 붕대 사이로
끔찍한 아기처럼 가볍게 숨 쉬는 걸 들을 수 있다.
튤립의 빨간색이 내 상처에 말을 걸고 그것은 교신한다.
튤립은 미묘하다. 나를 내리누르면서 떠있는 듯도 하고,
갑작스럽게 내민 혀와 색깔로 나를 뒤흔들면서,
내 목을 감는, 납으로 된 열두 개의 붉은 봉돌.


이 시는 플라스가 맹장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그녀는 튤립꽃조차 자신을 아프게 하며 내리누른다고 말한다. 그녀는 극도로 섬세하며 고통에 면역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플라스는 젊은 시절 자살 시도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당시 정신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던 전기충격요법 치료를 받기도 했다.


플라스의 대학시절 일기를 보면 그녀는 "그 앞에서 목 놓아 울음을 터뜨릴 만한, 나이 많고 현명한 사람이 필요해요"라고 쓴 바 있으며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세요? 당신을 원해요,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절대자의 도움을 구한 적도 있다(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2004, 김선형 역). 플라스는 남편을 제외하고는 주변에 도움을 청할 친한 지인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일까.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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