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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빛 Oct 22. 2021

일만 하는 시대는 갔다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즐겁고 행복하다면 멋진 선택을 한 거야!


 현장 생활이 6개월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토목공사가 마무리되고, 건물 안에 들어갈 기계와 전기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왔지만 쉴 틈도 없이 일요일 아침 일찍 현장으로 출발해야 했다. 현장 소장을 태우고 가야 해서 부산 해운대로 향했다. 그가 알려준 집 주소에 도착했고,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그는 내려오지 않았다. 도착 문자를 보내도 연락이 오지 않자,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집 문이 열려 있어서 거실에 앉아 있는 현장 소장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아내도 함께 앉아 있었다. 두 사람 표정이 좋지 않았다. 현장 소장은 천정을 올려 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그의 머리카락 더 하얗게 보였다. 앉아 있는 모습도 뭔가를 잃은 것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아내가 말했다.


 "일단 기다려봐요. 아이가 서울에 있는 친구 집에 갔는지 모르잖아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친구에게 연락 오면 당신에게 전화할게요”


 현장 소장의 중학생 외동딸이 가출을 했다. 나는 계속 머뭇거리다가 더 지체할 수가 없어서 인기척을 냈다. 현장 소장은 내 얼굴을 보면서 잠시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어두워졌다. 나는 사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차에 시동을 켜고 출발했다. 그때는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시대였다. 현장 소장이 늘 인간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주었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표지판을 보고 고속도로로 진입했지만,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을까 나는 조마조마했다.


 결국,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고 전북 남원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경남 남해로 빠졌다. 현장 소장은 밤새 잠을 못 잤는지 깊은 잠이 들었다. 나는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화장실에 다녀오자, 현장소장은 잠에서 깼다. 그리고,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둘러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잘못 온거니?"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길치여서요"

"가기 싫었는데 잘됐어. 오늘은 그냥 바람이나 쉬러 가자"

나는 놀랐다. 얼마 전까지도 그는 인생의 우선순위 중에 첫 번째가 회사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일 년 365일 중에 360일을 일한다며 자신이 얼마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지 자랑스러워 했던 소장님이 아니던가.


 "어제 밤새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난 미래를 위해서 지금을 희생하며 살아왔던 것 같아. 내 아이는 그 반대로 살았고. 서로가 너무 극단으로 살아왔어. 아무런 소통도 없이 말이야. 아이에게 너무나 무관심한 아빠였어."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네가 운전대를 잡았으니깐 네 느낌대로 가보자. 나도 지금부터 지도를 보지 않을 거니깐. 어디 한 번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가보자."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그의 말 대로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운전했다. 표지판의 이름이 끌리는 대로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낯설었지만 재미있었다. 우리가 간 곳은 섬진강, 화개장터, 지리산 화엄사였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은 곳은 섬진강과 화엄사였다.


 섬진강이 흐르는 곳에 나는 차를 세웠다. 흐르는 강물과 모래사장 위로 햇살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 섬진강 변 금빛 모래사장 위에서 무당이 굿을 하고 있었다. 현장 소장은 나에게 차에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강변 아래로 내려갔다. 무당 앞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까지 걸어가더니 뒤에 가서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딸을 위해 기도하는 것 같았다. 발길 닿은 대로 여행을 떠났어도 딸에 대한 아빠의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감고 기도했다.


 현장 소장과 다음으로 들린 곳은 화엄사 절이었다. 절까지 걸어가는 길이 그와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서로 말없이 걸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지리산이 가을 단풍으로 물들어 가듯 그날의 특별했던 일상들이 내 마음을 진하게 물들였다. 현장소장의 얼굴도 조금씩 밝아졌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미래를 위해 사는 것과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한 지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양쪽 모두 너무 극단으로 사는 것보다 균형을 이루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균형을 되찾기 위해 그날만큼은 '지금, 이 순간'을 선택했다. 그의 선택 덕분에 나는 회사 일과 가정을 어떻게 꾸려가며 살아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날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오직 회사만을 위해 열심히 살 뻔했다. 


 현장소장은 얼마 뒤에 회사를 관뒀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안부 전화를 했을 때 그는 가족과 함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란색 형광펜으로 칠해 자신이 그려 놓은 길을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빛나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었다.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당신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겁니다. 

– 꾸뻬 씨의 행복 여행(프랑수아 를로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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