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빛 Oct 22. 2021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혼자가 아니었다. 힘든 순간에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어야 할 때다. 그리하여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갈 때 발걸음이 정말 가벼워질 것이다. 


 산길을 달리면서 아침을 맞았다. 마라톤 대회 준비를 위해 숙소에서 폐수처리장까지 매일 아침마다 뛰었다. 두 번 숨을 들이쉬고 두 번 내쉬었다. 발이 땅과 맞닿을 때마다 호흡은 리듬이 되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기쁨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지금처럼 달리고 있을 때였다. 춘천 마라톤 대회에 풀코스 참가 신청을 했다. 부모님 반대가 있었지만, 완주하고 나면 무슨 일이든 끝까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발선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초반에 오버 페이스 하지 말자, 중간에 거품 물 수 있다.’ 쌀쌀한 날씨에 긴장한 근육들을 스트레칭으로 풀어주었다. 출발 신호와 함께 4시간대 페이스 메이커 뒤로 달렸다. 25km 지점까지 최고의 컨디션이었다. 대회를 준비했던 훈련량이 나를 버티게 했다. 오르막길이 나올 때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30km 지점이 지나자 내리막길에서 다리에 경련이 왔다. 우측 종아리 통증이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머리와 가슴은 이미 결승점을 넘어섰지만, 다리는 탈진이 되어 있었다. 고통스러웠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내딛기 힘들었다. 옆에서 누군가 손짓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손에는 하얀 장갑을 끼고, 이마에는 푸른색 밴드로 하얀 머리카락들을 고정한 단단한 체구의 할아버지였다. 힘들면 페이스를 늦추라며 두 손을 가슴 아래로 움직였다.


 완주가 목표였지만 내심 ‘걸으면서 완주하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걷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일단 멈춰서 근육을 풀어야만 했다. 멈춰 서서, 우측 종아리와 허벅지를 두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할아버지가 다가와서 내 등을 쳤다. 그리고, 나에게 누워 보라고 손짓했다. 나는 넘어지듯 누운 채 몸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한쪽 발바닥을 가슴에 대고 경련이 심한 다리를 펴주고 주물렀다. 아팠던 다리가 한결 나아졌다. 잠시 뒤, 나는 다시 일어섰다. 페이스를 잃어버린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나 혼자만 생각하고 달려왔는데, 할아버지 앞에서 부끄러웠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자, 할아버지는 나의 어깨를 쳐주면서 말했다.


 “젊은 양반, 죽자 살자 뛰면 정말 죽는 수가 있어, 즐기면서 뛰게나! 지치지 말고 말이야.”


 우리는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할아버지와 호흡을 맞추면서 알게 되었다. 인생은 혼자서 외롭게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달리면서 옆을 바라보는 여유와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했다.


 35km 지점에서 할아버지는 조금씩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숨이 차다면서 더는 힘들겠다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달리기를 멈췄다.

“나는 이제 그만 뛰어야겠네, 지금까지 충분히 달렸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는 말했다. 응급차가 있는 곳까지 할아버지를 모셔다드리고 나는 다시 뛰었다. 뛰는 내내 할아버지 생각을 잊을 수 없었다. ‘즐기면서 뛰자’라는 생각이 나에게 힘이 되었다. 38km 지점에 이르자, 주변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아무 소리 없이 뛰던 나는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사람도 함께 손뼉을 쳤다. 뒤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손뼉을 쳤다. 그 소리에 나는 용기를 얻어 말했다.

“힘내세요, 힘내세요!!!”

목소리가 우렁차게 나왔다. 내 목소리에 나도 놀랐다. 이제는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손뼉을 쳤다. 거리에 응원 나온 사람들도 손뼉을 치며 힘을 실어 주었다. 조금 전에 고통스러운 표정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로 인해 일어난 조그만 파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오히려 나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할아버지가 말했던 즐기면서 뛰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또다시 발이 무거워졌다. 이제는 목이 탔다. 수분이 몸에서 모두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가을 날씨였지만 햇살은 뜨거웠다. 잠시 뒤에 어디선가 비가 쏟아졌다. 마라톤 대회에서 마련한 인공 비였다. 머리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물방울은 내 몸속으로 스펀지처럼 흡수되었다. 무거운 발에 날개를 단 것 같았다. 나는 마음껏 소리 질렀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을 벌리고는 생명수를 마셨다. 온몸이 흠뻑 젖었다. 결승점까지 즐거운 기분을 이어 나갔다. ‘걸으면서 완주하지 말자’라는 나의 기준도 사라졌다. 뛰거나 걷거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즐기면서 완주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드디어 결승점을 통과했다. 완주는 나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었다. 나를 도와준 할아버지, 함께 뛰며 손뼉 친 사람들이야말로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힘들 때마다 책상 앞에 걸어 둔 마라톤 완주 메달을 바라본다. 내 삶의 의미 있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든 끝까지 하기 위한 도전이었지만, 인생 완주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었다.


 시골 폐수처리장의 생활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3년 동안 폐수처리장 생활을 돌이켜보았다. 인간에 의해 더럽혀진 물은 폐수처리장으로 들어와 분해되고 정화되어 다시 이전의 맑은 상태로 되돌아갔다. 시골 폐수처리장에 온 나는 때로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운명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어디든 흘러갈 수 있는 물줄기와 같은 유연함을 가지게 되었다. 앞으로 어떤 운명을 마주하더라도 물이 가진 운명처럼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바다로 흘러갈 용기가 생겼다. 



이전 11화 히어로가 여기 있었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