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필요할 때 어린 아이의 눈과 마음으로 다가가자. 낯선 세상을 처음 마주한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부터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자. “사랑해, 내 마음아!”
낯선 사람의 문 앞에 서 있다. 쉼 호흡을 크게 했다. 핸드폰 창으로 머리와 넥타이를 정리하고 눈을 감았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환한 웃음을 짓는다. 낯선 사람이 나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문 앞에서 좋은 상상을 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벨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순간 문에 달린 문고리가 걸리고 더 이상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틈 너머 고객 얼굴이 보였다. 얼마 전 고객이 던진 제품에 맞은 기억이 떠올라 이마에 난 상처가 쓰라렸다. 계속 서서 이야기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객에게 명함을 건넸다. 여자는 명함을 쳐다보고 다시 한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문고리 빼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하지만 문 틈으로 클레임 제품을 건네 주고 다시 문이 닫혔다.
폐수처리장 근무가 끝나고 경기도 파주로 발령이 났지만 재정이 악화되어 정든 회사를 떠나야 했다. 서울에 있는 식품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새롭게 맡은 일은 불만 고객을 상대하는 업무였다.
이전에도 고객 방문을 경험했지만, 영업을 위해 만난 고객과 불만이 가득한 고객을 만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화난 고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시골 폐수처리장에서 근무했던 경험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다시 부딪쳐서 배워야만 했다. 혼자서 처음 고객이 대응했을 때를 잊지 못했다.
회사를 옮긴 지 6개월 남짓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품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바쁜 업무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고객 불만이 심각한 경우에는 개인 전화로 연결되었다. 반 시간 넘게 수화기 너머 고객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팀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수화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급하게 오라는 손짓을 보고 나도 모르게 뛰어갔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야 수화기가 책상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화기를 귀에 가져갔지만 전화는 이미 끊긴 상태였다.
다시 고객에게 전화가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퇴근 무렵 고객이 직접 회사를 찾아왔다.
"야, 당장 내려와!, 여기 사장 누구야!"
나는 고객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때 고객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고객은 나에게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었고 낯선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게 힘들었다. 왜 사람들은 불만을 표현하는지 알지 못했고, 왜 그런 사람 앞에 죄인이 되어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 의문을 풀어준 기회는 의외로 내 가까이에 있었다.
주말에 세 살 된 아이와 손을 잡고 산책을 할 때였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좋은 향수 냄새가 나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도 크고 늘씬한 여자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여자의 향수는 진하게 느껴졌다. 옆에 나란히 선 여자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어떤 향수인지 궁금했다. 잠깐 여자의 향기에 취해 있을 때, 아이가 잡고 있던 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아빠, 이상한 냄새나”
“무슨 냄새? 아빠는 좋은 냄새가 나는데”
“똥꼬 냄새나!”
그 소리에 나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고 나도 모르게 아이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향수 냄새가 안 좋았구나. 이모가 미안해.” 그녀는 무릎을 굽혀서 아이의 눈을 맞추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아이 손에 쥐여 주었다.
“이모가 맛있는 사탕 줄게.”
입속에 사탕이 들어가자 조금 전 찡그렸던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신호등이 바뀌자 여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는 아이와 함께 건널목을 걸어갔다.
아들도 나처럼 냄새에 민감했다. 하지만 향수 냄새를 ‘똥냄새’ 라고 말하는 아이의 반응에 놀랐다. 나에겐 좋은 향기였지만 아이에게는 불쾌한 냄새였다. 물론 진한 향기를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사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향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아이의 불만에 반응하는 여자의 행동이었다. 나였으면 똥냄새 난다는 소리에 마음이 불편했을 텐데 가까이 다가가 아이의 마음에 공감해주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다름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엔 사탕까지 주면서 아이와 아빠 모두에게 감동이라는 선물까지 주었다.
고객에게 감동은 못 주더라도 공감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두더지가 똥을 머리 위에 얹고 누구의 똥인지 찾아다니는 이야기처럼 내 머릿속에 불만을 가득 채우고 타인의 불만을 들여다보려고 했으니 제대로 된 만족을 시킬 수 없었다.
“에그, 이게 뭐야!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두더지가 소리쳤어요.
그러나 눈이 나쁜 두더지는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베르너 홀츠바르트 –
그 동안 수없이 타인의 마음을 예측하려고 했었다. 나의 마음에 대해선 무관심한채 말이다.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볼 수 있는 눈조차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을 들여다 보는 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어쩌면 우연히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책 속에서 읽었던 문장 속에서, 그리고 어린 아이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