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전에는 나의 길을 걸어왔다면, 결혼 후에는 아내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저 인연에 감사하고 내가 가진 에너지를 가족과 함께 나누는 것이 슬기로운 삶이다.
아는 지인분이 여자를 소개해 주는 날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의 만남에서 실패를 해서인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시골 폐수처리장에서 일하는 사람, 작은 티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 옷에서 냄새까지 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만남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고향 울산집에서 현장으로 가는 길에는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한 해인사가 있었다. 해인사로 올라가는 오솔길을 걸으면서 기도했다. 이전에는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는데 오늘은 만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해인사 맨 위쪽,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함박눈이었다. 길 위에도 절 지붕에도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추운 겨울이 지났는데,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카메라에 ‘이른 봄에 함박눈’을 담았다.
그날 저녁에 그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카메라에 담은 함박눈을 보여주었다. 그녀도 눈을 보면서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친김에 용기 내서 말했다.
“오늘 만남을 하늘에서 축복해주는 것 같습니다.”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닌지 마음이 불편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웃으면서 사진을 보았다. 해인사의 기도를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오늘 만남 이후로 더는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이전 만남에서는 옷에서 냄새라도 나지 않을까? 폐수처리장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긴장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날만큼은 자연스러웠다. 신데렐라가 저녁 시간이 지나면 이별해야 하듯이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이후로 나에게 두 가지 습관이 생겼다. 첫 번째는 우연한 일을 좋은 의미로 연결해서 운명처럼 만들어 놓는 습관이었다. 그날의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어버린 나는 그해 늦가을에 그녀와 결혼을 했다. 첫 아이가 태어날 때 똑같이 함박눈이 내렸고 둘째 아이를 만나는 날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그래서 눈이 오는 날이면 가슴이 두근거리곤 한다.
두 번째 습관은 인연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인데, 행동으로 말하는 방법이다. 발바닥을 주무르며 ‘감사합니다’를 마음으로 말하면서 전하는 습관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내가 결혼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것도 당신의 지친 발바닥을 주무르는 모습 때문이라고 말했다. 발바닥을 주무르는 순간, 서로의 마음이 연결되었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마음을 움직였고 담아두었던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두 아이에게도 어렸을 때부터 발바닥을 주물러 주었다. 인연에 대한 감사로 시작했는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데 도움이 되었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지금도 발바닥을 주물러 달라고 말한다. 평상시 무뚝뚝하고 대답도 하지 않은 아이지만, 주무르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툭 던지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운이 좋으면 깊은 대화로까지 이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