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빛 Oct 22. 2021

아내의 큰 그림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 스리 라마크리슈나 - 


 처음 아내의 집에 갔을 때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렸던 기억보다 책 장에 있는 수많은 책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신혼집으로 책을 옮길 때 아내는 대부분의 책을 옮겨 가길 원했다.


 ‘집도 작은데, 이렇게 많은 책을 가져가면 짐만 될 텐데…’


 혼잣말로 말할 뿐, 나는 종이박스에 말없이 책을 담았다. 신혼집에 도착한 책은 오랫동안 창고에서 먼지만 쌓여갔다. 두 번의 이사가 있었지만, 상자째로 옮겨갈 뿐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다. 거의 8년 동안 테이프에 밀봉된 채 뜯기지 않았다. 나는 일하느라 아내는 아이를 키우느라 책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아내의 책 상자는 나에게 무거운 짐 같은 존재였다.


 회사를 옮기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 힘들어할 때였다. 새로운 업무를 어떻게 다시기 시작해야 할지, 낯선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어려웠다.


 어느 날, 베란다에 나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눈앞에 아내의 책 상자가 보였다. 분명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 어느 순간 눈에 들어왔다. 책 상자가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이제 그만 나를 열어줘”라고 상자 뚜껑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오래된 테이프를 뜯을 때마다 뿌연 먼지가 올라왔다. 시집과 소설책, 그리고 고전문학책이 들어있었다. 책들이 내 손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느낌이 좋은 제목부터 끄집어냈다. 그리고 찌든 때를 닦아내며 책을 펼쳤다. 아내가 읽으면서 책갈피로 사용했던 나뭇잎과 종잇조각들이 보였다. 습관처럼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산속에 흙냄새처럼 구수했다. 어떤 책 속에는 꽃이 눌러져 누름 꽃이 되어 있었다. 떼어내자 꽃잎 자국이 선명했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자국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가 물결치며 그은 밑줄이 보였다. 정겨웠다. 분명 아내의 마음을 움직인 행복의 물결이었으리라. 그 물결 위에 글이 내 마음도 움직였다. 오래전 아내와 내가 연결된 순간이었다. 책 읽는 게 서툰 나는 아내의 밑줄을 따라 읽어 내려갔다. 아내의 밑줄은 마치 실타래 같았다. 미궁에 빠져 탈출하기 위해 붙잡고 있었던 소중한 실타래. 한 줄 한 줄 마법의 주문을 읽어가며 나의 고민을 하나씩 풀어갔다. 아내의 흔적이 있는 곳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다.


 ‘이 부분에서 아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내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밑줄 아래 행간에서 머무는 시간이 즐거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 종이 뭉치였던 책에서 깨달음이라는 보석을 발견했다.


 ‘아내가 먼저 책 상자를 열어 책을 읽으라고 했다면 과연 내가 읽었을까?’

스스로 책 상자를 열 수 있도록 기다려준 아내가 고마웠다. 그리고, 아내의 마음을 움직인 밑줄은 작가의 생각과도 연결해 주었다. 아내의 밑줄 중에 기억에 남은 것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한 구절이었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하는 부르는 것은 외부로부터 우리의 안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아내가 미래의 나에게 쓴 편지처럼 느껴졌다. 지금 나의 고민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고민과 불만들은 나 자신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오래된 책 상자 안에는 소중한 책들이 가득했고, 그 속의 문장들은 길을 잃어버린 나에게 환한 등불이 되어주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 스리 라마크리슈나 - 


이전 16화 진실한 만남을 위한 기도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