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의 맥주는 인어와 함께
시체스의 태양은 2월에도 한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하여 계절을 가늠할 수 없었다. 지구를 뚝 잘라 여름만 지속되는 궤도를 도는 것처럼 보였다. 이른 아침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할 때의 옷차림으로 시체스를 감당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내복부터 패딩까지 켜켜이 껴입고 나는 시체스의 태양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여쁜 그녀와 함께.
시체스로 향하는 작은 버스 안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아침잠이 금세 달아났다. 어여쁘도다. 그림에서 튀어나온듯한 미모와 헐렁한 점퍼로도 가릴 수 없는 빼어난 몸매라니.
그녀는 딕펑스의 비바청춘을 작게 틀어놓고 자기소개를 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희한하게도 그녀가 오버랩된다. 미모의 청춘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비바다. 만세!
그녀는 현지 가이드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더더 많은 것을 원했다. 왜? 그녀는 예뻤으니까.
몬세라트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왜 약술을 담그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았고,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나, 축구천재 메시가 세웠다는 시체스의 호텔에도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어차피 먼 옛날이야기, 닿기 어려운 이야기.
우리는 그런 것보다 왜 그녀가 이곳에서 현지 가이드로 우리와 만났는지, 그녀는 몇 살인지, 결혼을 했을까 등등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에 목말라했다.
그녀는 건축학도였다. 설계도를 그림처럼 그려대는 그녀를 건축을 전공한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겨우 고르고 골라 건축 관련 회사에 취직하여 설계도를 그릴 꿈에 부풀대로 부푼 그녀에게 회장님의 커피를 내리고 일정을 체크하는 비서실 말단 업무가 주어졌다. 그녀는 그녀만의 건물을 자신의 설계도에서만 세웠다 부수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에인 랜드가 쓴 파운틴 헤드의 주인공 하워드 로크를 떠올렸다. 그녀는 하워드 로크의 여인 버전? 그러나 거기까지. 그녀는 이왕 내릴 커피라면 한 사람보다 전 세계인을 위해 내리는 게 낫겠다며 스튜어디스가 되었다. 그녀는 미모만큼 비약도 심했다. 평생 설계도만 그리며 살고 싶던 그녀는 바람이 없어도 흩날리는 모양의 푸른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뾰족구두를 신고 몸매를 훤히 드러내는 제복을 입고 하늘을 날았다.
BUT, 그녀는 미소와 친절로 무장하라는 교육을 주구장창 받았지만 상냥하지 않았고, 마음에 없는 말을 절대 하지 못했다. 항공 승무원으로 낙제점에 가깝던 그녀는 레이오버 (승무원이 일정기간 현지에서 머무르는 비행)로 로마에 다섯 번째 머물던 날 바티칸 박물관 투어를 신청했다. 바티칸 박물관을 안내하는 가이드(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럽 전문 여행사 대표)의 박식함에 꽂힌 그녀는 비행하는 세계인을 위해 커피를 내리는 대신 가이드의 길로 들어섰다나 어쨌다나. 그녀는 박식한 가이드한테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았는지, 책은 또 얼마나 많이 읽어댔는지라며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이토록 어여쁜 그녀를 혹독하게 훈련시킬 수 있었을까? 못 믿겠다.
로마에서 현지 가이드가 되었는데 어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사냐고 집요하게 묻는 덩치 큰 청년의 속셈을 그녀는 우아하게 되받아쳤다.
다음에 또 만나면 이야기해줄 테니 다시 만나요~
귀를 쫑긋 세우던 우리들은 실망했지만 그 청년만큼 무지막지 궁금하지 않았기에 그것으로 족했다.
그녀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리에게 지금부터 자유라며 어떤 골목길로 들어가더라도 지중해로 통하니 아무 걱정 말고 시체스에 녹아들라고 했다. 혹시 전대미문의 생맥주로 시체스를 기억하실 분들은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이 언니..쎄다!
한국인에게는 푸른 바다의 전설 로케이션 촬영지로 더 친근한 시체스.
혹시 멸종 직전의 인어 심청이 전대미문의 미모 가이드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
시체스 해변의 사진에 주옥같이 등장하는 산트 바르톨로메 성당에서 지중해로 내려가는 25번째 계단에 서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체스에 올 때마다 지중해 바다에 발을 헹구어 내고 자신의 인어 꼬리가 잘 있는지 꺼내 보는 그녀를 상상해보니 그럴 법도 하다.
우리의 머리 꼭대기에서 수직 상승한 하늘에 태양이 박제된 듯 움직일 줄을 모른다.
저 몹쓸 태양의 열기가 모자를 꾹꾹 눌러쓴 머리통을 삶아 버릴지도 몰라...
눈앞에 닥친 걱정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골목골목을 우리가 누비는 동안 그녀와 그녀의 추종자가 되어버린 4명의 사나이들은 모레노에서만 마실 수 있는 전대미문의 생맥주에 몸과 맘을 다 내주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이 생맥주를 마시지 못하면 마드리드까지 날아가야 한다는 겁박을 일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낮술을 이 정도까지 마실수는 없다.
아무리 여행자라지만.. 아무리 그녀가 이쁘다고 하지만..
시체스 해변을 눈으로 낚아채고 , 푸른 바다의 전설도 귀에 걸었으니 이제 우리도 모레노 한 귀퉁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비집고 앉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전대미문의 맥주 한 모금을 뜨거운 태양에 홀라당 타버린 입으로 가져간다.
존재한 적 없었던 맥주를 세상에 내놓자며 맥주회사와 의기투합한 페란 아드리아 (미슐랭 쓰리스타 레스토랑 <엘불리>의 셰프)가 정찬용으로 빚어낸 전대미문의 맥주. 작명 센스도 가히 미슐랭 쓰리스타 급이다.
첫 모금에 샴페인을 닮은 풍미를 입안에 머금으시라.
다음으로 레몬과 귤향에 취하시라.
꽃향기가 은은히 입안에 퍼지는가?
그 안에 고수와 비타민C도 녹아있으니 생기를 쟁취하시라.
톡 쏘는 탄산의 지속력을 꺼뜨리지 않는다면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청량하리라.
전대미문의 미모 가이드가 전대미문의 생맥주가 찰랑거리는 와인잔을 들고 우리의 여행에 건배한다.
시체스는 전대미문의 생맥주를 낮술로 마시기에 그만인 바닷가 마을이에요.. 홍홍홍.
결국, 우리는 시체스에서 낮술에 꼬리를 저당 잡힌 인어일지도 모를 그녀와 챙챙 잔을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