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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Sep 22. 2018

비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감옥이라는 담벼락 안에 갇히게 된다면 어떤 게 가장 힘들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유의 박탈. 자고, 입고, 먹고, 보고, 가는 등등, 세상의 모든 자유를 빼앗기다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면.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답답함과 신경질적인 짜증이 왈칵, 밀려온다.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더위'도 수감생활에 있어 만만찮은 적수인가 보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신의 존재만으로 누군가의 증오를 산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넘치고 넘치는 시간도 삶을 한없이 늘어지게 만들 것 같다. 어느 휴일.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무 할 일 없이 하루 종일 멍하니 TV만 보다가, 문득 오늘 하루 집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껴지는, 그 메스꺼움과 어지러움. 하루도 이런데 1년, 2년, 10년은 오죽할까. 재미있는 일도, 신나는 일도 하나 없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시간들은 어떻게 견뎌야 할까. 덧없이 해가 뜨고 지는 걸 속수무책으로 수없이 바라봤는데, 그런데도 태양이 또 떠오르면. 저놈의 태양을 냅다 때려눕히고 싶을 만큼,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는 괜한 큰 분노와 폭력이 내 안에서 솟구칠 것 같다.


그러나 고 신영복 교수는 답답하고 억울한 시간들을 '성숙'과 '성장'으로 가득 채웠다. 평생을 한 가지에만 집중해 온 장인처럼 묵직하고 깊은 사람처럼.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거나 파르르 떨지 않는 듬직한 사람. 화내고 성내며 혈압을 높이기보다는 타인을 이해하고 그에게 공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에게서 들린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성찰을 이루었다. 


인간적 신뢰를 받지 못하면서 단지 형이라는 혈연만으로서 형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가 너의 형이 되기를 원하는 한, 나 자신의 도야를 게을리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해본다.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연관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어서의 생활이란 그저 시간의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독백은 바쁘다는 핑계로 피상적인 사고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일상이 단조로워 새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니 신선한 글을 쓰지 못한다는 나의 푸념은 단순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절로 든다. 나는 감옥에서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으니. 신문과 책을 통해 언제나 새로운 소식을 접한다. 친한 친구들과 만나 이런저런 수다를 떤다. 그런 가운데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깊은 성찰이 없는 것은 생활의 단조로움 때문이 아니라, 깊이 몰두하지 않는 나의 게으름 때문이다. 


좀 더 생각해 보니 오히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하고 있어 깊은 사색 잠기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바쁜 일상을 비우고, 내 마음에 가득한 욕심과 불만을 버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떨쳐냈을 때, 그래서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고 신영복 교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를 이루었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을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도 비우고, 시절에 대한 원망도 비우고, 여기서 뭐하는가 하는 자책이나 빨리 세상으로 나가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조급함을 지웠기에 그는 단단하게 자신만의 생각을 다지고 빚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워야 할 것들이 많다. 산 날보다 살 날들이 더 많은 나이. 조급해하거나 초조해 하기에는 아직도 젊다. 인생에 실패했다고 좌절하거나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며 낙심에 빠져 삶을 단정 짓기에도 성마른 시기. 내게 없는 것을 욕심내거나 놓쳐버린 기회들에 내내 미련을 두는 한심한 일도 내려놓고. 


나만의 사색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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