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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슨금 Nov 17. 2023

사이다, 사과가 술이 된다고?

내가 마실 술은 내 손으로 내 입맛에 맞게 만들어 마십니다.

우리를 반겨주는 거위들

올 10월 자연발효로 '내추럴 사이다'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왔다. 농장은 런던에서 기차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햄프셔의 Alton 지역에 위치해 있다. 가는 길에 거위와 오리, 양들과 인사하고, 작고 아늑한 개울가를 지나면 폭 박혀있는 농장을 찾을 수 있다. 동네 분위기에서 시골의 정겨움이 느껴졌다. 농장에 도착하자 고양이가 우리를 반겨주었고, 주인 내외는 영국 사람답게 우리가 앉자마자 'Coffee or Tea?'부터 물어보셨다. 차 한 잔씩 앞에 두고 우리 포함해서 도합 5명이 사이다 메이킹 과정을 함께했다. 이곳은 상업적으로 사이다를 만들어서 파는 사이더리가 아니다. 사과농장이 있는 부지의 B&B 호텔이다. 주인분은 연중 상시로 Bed & Breakfast를 운영하며, 사과수확 철에만 홈브루잉 클래스 및 자가소비를 위한 사이다 양조를 매년 해오고 있다. 오랫동안 해온 경험으로 축적된 자가양조의 비법들을 기본부터 강의자료와 함께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고, 물론 직접 만드는 실습도 함께 했다. 팔기 위한 술 만들기 수업이라면 효율적인 양조장비, 원가율 등 이것저것 따져야 할 게 많았을 텐데, 정말 순수하게 '내가 마실 술은 내 손으로 내 입맛에 맞게 만들어 마시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사과로 술을 만드는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1. 농장에서 사과를 줍는다.

2. Crushing 장비로 사과를 잘게 으깨준다.

3. Pressing 장비로 사과즙을 짜낸다.

4. 사과즙을 에어락(air-lock)이 달린 용기에 담아 보관한다.

5. 발효가 충분히 일어나 효모 사체가 바닥에 쌓이면 걸러준다.

6. 시간의 마법을 기다린다.


1. 농장에서 사과를 줍는다.

농장에 달려있는 사과 모습

수업이 모두 끝나고 시간 여유가 있어 잠시나마 사과 수확을 도왔다. 수확이라고 하면 보통 나무에 달린 사과를 따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데 그러지 않고 무조건 떨어진 것만 줍는다. 왜? 나무는 언제 사과가 충분히 익어 떨어져야 할 때인지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과 수확기에는 매일 한 번씩은 사과밭을 한 바퀴 돌고 엉금엉금 기어서 사과들을 바스켓에 담아와야 한다. 기계로 나무 기둥을 흔들어 열매를 다 떨어뜨린 후 주워가는 대규모 사과농장과는 방법이 확연히 다르다. 물론 기계로 빠르게 끝내버리는 것보다 노동력이 훨씬 많이 들어가는 일이지만, 수고스러워도 분명 결과물에 차이를 가져올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이 방법을 고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Home brewing tips

보통 사람들이 사과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집에서 소용량으로 만들 땐 사과를 줍는 대신 '유기농 사과'를 구매하면 된다. 수업 도중에 물어보니 일반 사과로도 자연발효가 안되진 않는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 농장에서는 이미 십수 년간 사이다를 만들며 자연효모들이 장비와 공기 중에 많이 있기 때문에 발효 과정이 더 수월한 게 아닐까 싶다. 사과 껍질에 자연효모가 있으니 세척하지 않고 바로 사용할 거기 때문에 잔류 농약이 걱정된다면 유기농을 선택하는 게 좋다.


2. Crushing 장비로 사과를 잘게 으깨준다.

Crushing 과정

으깨는 방법으로는 옛날식으로 손으로 돌려가며 으깨는 장비도 있고 전기를 연결해 자동으로 사과를 넣으면 으깨져 나오는 장비도 있다. 우리는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장비를 사용했다. 타워처럼 생긴 노란색 기계를 위이잉 돌리니 순식간에 이 단계가 마무리되었다.


* Home brewing tips

일단 사과를 칼로 잘게 썰어준 뒤 블랜더 믹서기나 도깨비방망이로 좀 더 잘게 으깨면 된다.


3. Pressing 장비로 사과즙을 짜낸다.

Pressing 과정

즙을 짜내는 방법도 수동 옛날식과 자동 신식 기계 두 가지가 있다. 이건 두 가지 모두 경험해 보았다. Pressing의 원리는 사과 으깬 걸 차곡차곡 쌓아서 위에서 무거운 걸로 눌러주는 거다. 자동 기계의 경우에는 통 내부의 고무에 물을 잔뜩 채워 물의 압력으로 사과즙을 옆쪽 사방으로 뿜어낸다.


* Home brewing tips

채반이나 면포 등을 활용해 최대한 즙을 짜준다.


4. 사과즙을 에어락(air-lock)이 달린 용기에 담아 보관한다.

데미존에 에어락으로 보관한 모습

이렇게 짜낸 사과즙에는 알코올 발효에 필요한 물, 당분, 효모가 이미 다 들어가 있는 상태기 때문에 추가로 더 넣을 게 없다. 그대로 가만히 보관하면 되는데, 에어락 없이 유리병에 밀봉해 놨다가는 정말 큰일 나는 수가 있다. 발효과정에서 생기는 탄산, 이산화탄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터질 수 있으니 꼭 에어락이 있는 적합한 발효용기를 사용해야 한다.


* Home brewing tips

우리나라에서는 '에어락 발효통 담금주병 과실주병'과 같은 단어들로 검색하면 쉽게 찾아 구매할 수 있다. 흔히 매실청 등 담글 때 쓰는 초록색 플라스틱 용기도 에어락 설치가 가능하니 사용해도 된다. 주의할 점은 용기에 공기가 너무 많으면 안 되기 때문에 거의 병목까지 사과 주스로 채워줘야 한다. 그러니까 사과 주스의 양에 따라 알맞은 용량의 발효조를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양이 적다면 작은 플라스틱병을 써도 좋지만 사용 전 내부를 깨끗하게 씻어내고 써야 한다. 에어락이 없다면 뚜껑만 살짝 닫아두는 것도 괜찮다. 꽉 닫지 않아야 한다. (이 이유 역시 탄산의 압력 때문이다.)


5. 발효가 충분히 일어나 효모 사체가 바닥에 쌓이면 걸러준다.

Racking 시연 과정

용기가 담은 뒤부터는 적정한 온도 유지가 관건이다. 직사광선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하되 너무 추우면 효모가 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에 8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반면에 한여름처럼 너무 더운 온도가 계속되는 날씨라면 발효가 너무 과하게 빠르게 일어나 금방 시어져 버리기 때문에 맛있는 사이다를 만들 수 없다. 다행히도 사과 수확기인 가을 날씨는 효모가 활동하기 가장 좋은 온도(약 14-21도)이다. 우리의 사이다는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작용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몇 주가 지나자 효모 사체가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사이펀을 이용해 위의 맑은 액체 부분만 새로운 용기로 옮겨주고, 바닥의 효모 사체는 물로 헹궈내주면 좀 더 깔끔한 맛과 향의 사이다를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을 Racking이라고 한다.)


* Home brewing tips

집에서 소용량으로 제조할 경우 이 단계에서 바로 탄산수 전용 플라스틱병이나 클립 유리병으로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을 수 있다.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통상 10일 정도는 상온에 두어야 충분히 발효가 되며, 중간중간 스포이트 같은 걸로 맛을 보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상태를 알고 병입 날짜를 정하는 게 좋다. 유리병은 깨질 수 있으니 탄산수 페트병처럼 짱짱한 페트병을 잘 살균해 쓰는 걸 추천한다.


6. 시간의 마법을 기다린다.


잘 발효되고 있나 살펴보는 모습

10월 초에 만들었으니 3개월 뒤인 내년 1월쯤에는 마셔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대략 1년 정도는 숙성해 두고 마시라고 한다. 올해 나온 햇사과로 만든 사이다는 내년 사과가 나오고 새로운 사이다를 만들기 시작할 때 즈음이나 맛볼 수 있는 거다. 실제로 자연발효 방식으로 만들어서 판매되는 전통적인 사이다들은 올해 신제품은 모두 작년에 만들어 둔 제품이다. 이 1년이라는 시간이 사이다에 마법을 부려서, 처음 사과즙을 맛봤을 때의 그 쨍한 단맛이 알코올과 탄산 그리고 복합 미묘한 풍미로 완전히 변화될 거다.


* Home brewing tips

좀 더 알코올 도수를 높이고 싶다면, 처음에 사과즙을 짜고 나서 즙 용량의 5% 정도의 설탕을 함께 녹여 넣어주면 된다. 좀 더 탄산감이 강한 사이다를 만들고 싶다면, 병입 할 때 소량의 설탕물을 추가해 주면 되는데 이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계속 탄산이 생기게 방치해 두었다간 병이 터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창고 혹은 냉장고를 열었는데 터진 사이다 유리병 파편으로 난리가 나 있다니?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살짝 열어주어 압력을 빼주고 테이스팅을 해보며 원하는 적정 수준의 탄산감을 찾아가면 된다.




남편 '김주녁's Comment

사과나무 아래 떨어진 사과 줍기 현장

잉글랜드 전통주 중 하나인 애플사이다 담그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본격적으로 사과가 출시되는 9월부터 12월, 헤레포드와 서머셋, 켄트 등 잉글랜드 곳곳은 사과를 수확하느라 여념이 없다. 영국에서 확인된 사과 종만 2,500여 가지가 되며, 지역에 따라 주로 생산되는 사과종이 다르다. 이렇게 수확한 사과를 사이다의 관점에서 네 가지 분류기준으로 나눈다. 전통방식으로 양조하는 사이더리는 그렇게 나눠진 사과를 적절히 조합하여 자신만의 사이다를 만든다.


애플사이다는 ‘써머스비’나 ‘댄싱사이다’로 한국에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전통방식을 따르는 영국의 애플사이다는 그것들과 제조방식에서도 맛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사과를 재배하는 것에서부터 수확하는 방식, 사과주스를 만드는 방법, 자연 발효에 이르는 과정에 정성이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일 년간 자연이 가져다준 풍부한 산물을 가지고 정성스레 술을 빚는 일. 우리나라 막걸리가 그러하듯, 술을 빚는 세계 어느 곳이든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 같다.


운 좋게 23년 햇사과로 직접 사이다를 만들어 보았다. 사과주를 만드는 원리는 정말 간단하고 쉽지만 '잘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사과주는 작은 디테일이 아주 큰 차이를 빚어낼 가능성이 높은 술이었다. 무엇보다 온도가 중요한데, 두세 평 남짓한 작은 월세방에 얹혀사는 신세에 개인 냉장고가 어디 있겠는가. 그나마 가장 서늘한 방구석 옷장 안에 넣고 효모가 잘 살아있는지 매일같이 확인하고 체크하며 한 달여를 지냈다. 효모가 열심히 발효하면서 에어락에서 뽀글뽀글 귀여운 소리가 났다.


한국에 돌아가면 새롭게 도전해 볼 분야가 나타나서 즐거운 마음이 든다. 일 년에 딱 한 번, 자연이 가져다준 사과로 나만의 사이다를 만든다면 행복할 것 같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50번의 빈티지를 만드는 걸 목표로 삼아보는 것도 좋겠다. 나만의 농장을 만들어 보는 것 - 이건 어쩌면 필수불가결할지도 - 거기에 내가 그토록 바라던 사랑방도 만들어두어 이웃손님들과 오손도손 욕심 없이 사는 것도 너무 좋겠다. 생각만 해도 좋다.


과연 나의 첫 방구석 사이다는 어떤 맛이 날까. 12월 보틀링 예정. 세 달 동안은 안정화를 하고 내년 봄에는 마셔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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