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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윤제 Nov 07. 2022

옥수수밭의 구덩이

1,

  자정을 알리는 알람이 날카롭게 울렸다. 그는 시계를 더듬어 찾아서 눌러 끈 다음 느릿하게 침대를 내려갔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광활하게 펼쳐진 옥수수밭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빛을 따라가자 크고 환한 달이 공중에 걸려 있었다. 3m 정도의 옥수수가 춤을 추듯 몸을 흔들자 달빛이 파편처럼 튀어 올랐다. 그 어떤 방향성도 없는 무의미하고 무질서한 흔들림이었다. 커튼을 닫은 그는 의자에 걸쳐놓은 카키색 체크 셔츠를 입고 거실로 나갔다. 옷가지와 신문 쪼가리가 발에 걸렸다. 딸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문손잡이를 당기자 옥수수가 와르르 쏟아졌다. 방안에는 옥수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1인용 침대를 완전히 뒤덮은 옥수수는 책상의 형체를 겨우 남겨두었다. 겨우 형체만 보였다. 문이 열린 옷장에도 허연 수염이 달린 옥수수가 가득 쌓여 있었다. 방문을 닫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도 씨알 굵은 옥수수가 쌓여 있었다. 산더미 같은 옥수수 더미에 가죽끈이 삐져나와 있었다. 가죽끈을 잡아당기자 아내의 핸드백이 딸려 나왔다. 핸드백 속에는 손때 묻은 립스틱이 전부였다. 안쪽 지퍼를 열어보니 그의 결혼식 사진이 나왔다. 주례석에 아내가 근무하던 학교의 교감이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주례를 본 교감은 키가 작았고 혀가 짧았다. 대신 말이 길었다. 교감이 훈시하듯 주례사를 늘어놓자 하객들이 똥 마려운 개처럼 몸을 비틀었다. 그 역시 소변이 마려워서 식은땀을 흘리며 교감의 주례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교감은 제 할 말을, 이젠 먼지처럼 사라진 모호하고 관념적인 말을 전부 쏟아낸 다음에야 긴 주례사를 끝냈다. 그제야 주리를 틀던 하객들이 몸을 바로 하고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핸드백을 내려놓고 마당으로 나간 그는 창고 문을 열고 스위치를 켰다. 창고 한쪽에 전기톱, 그라인더, 망치, 리퍼, 줄자, 평형계가 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20여 개의 삽과 곡괭이가 세워져 있었다. 그중 다섯 개의 삽은 앞부분이 닳았거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새 삽과 곡괭이의 나무 손잡이에 붉은색 페인트로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삽과 곡괭이를 살피던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붉은색 삽에 멈췄다. 삽을 들었다. 그 어떤 오물에 닿지 않은 신선한 쇠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그는 의장대가 총검을 돌리듯 삽을 휙휙 돌렸다. 삽이 경쾌한 파장을 일으키며 허공을 선회했다. 삽을 고른 그는 불을 끄고는 대문을 나섰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올 뿐 주택가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삽을 어깨에 걸친 그는 자신의 집 담장을 거슬러 올라갔다. 짧은 담장이 끝나는 곳부터 옥수수밭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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