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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May 13. 2019

열일곱, 스물넷, 스물일곱

내 삶이 3부작이라면

 열일곱



차라리 내신을 잘 받을 수 있는
학교에 가는 게 나을 거야.
너는 경쟁에 강한 타입이 아니니까…


중3 담임 선생님의 말에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여고가 아닌 집이랑 가까운 공학에 갔고, 왠지 서연고는 쉽게 갈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금방 수그러들었고, 착한 친구들을 좋아했지만 멋진 친구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어쩌다 어울린 걔네들 따라 마이와 치마를 줄였고, 뺏긴 마이를 찾으려고 몰래 창문을 넘은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겐 싫증 냈지만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 애에게 전전긍긍했고, 선생님을 잠시 좋아하기도 했다.


유독 일찍 하교하던 어느날의 낮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해가 져 그림자가 채워지는 콘크리트 바닥을 걸으며 나는 담쟁이를 보거나 지나가는 차를 보거나 앞에서 걷는 여자애 머리의 매끄러운 링을 보거나 그게 아니면 하늘을 보고는 했다. 횡단보도의 흰 선만 밟거나 들꽃이 보이면 쪼그려 앉아 파스텔 톤 꽃이 있는지 찾거나 그렇게 꽃을 꺾는 내 모습이 소녀스러워 좋아하거나 했다. 핸드폰도 끊기고 버스비도 없을 때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오던 어느 날의 저녁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저녁이기도 했고, 야자가 끝나고 나를 데리러 온 아빠를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방음이 되지 않는 우리 집 빌라는 유독 발자국 소리가 잘 들렸다. 아래층에서부터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나는 이불을 덮었다. 나는 아빠를 싫어했는데 어느샌가 내가 싫어하는 그 모습을 동생에게 그대로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자주 혐오감에 빠졌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다녔는지 잘 모르겠다. 꽃을 꺾고 횡단보도의 선을 밟고 이불을 뒤집어쓰던 그때의 나는 내가 지금 이렇게 클 거라고 상상했을까? 아마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나의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 편이니까.




스물넷



엄마는 공부를 잘했다. 엄마가 공부를 잘했는 지를 증명해주는 서류 같은 건 없다. 그냥 본인과 외가 친척들의 말이 전부다. 그래도 엄마가 공부를 잘했다는 점은 같이 살다 보면 저절로 알 수 있다. 세월이 가져다준 지혜이기도 하겠지만, 엄마는 두뇌 회전이 매우 빠르다. 그리고 나처럼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 없이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한다. 게임도 매우 잘하는데 내가 초딩땐 스타크래프트를 했고, 한게임 맞고는 정말 ‘신'의 단계였으며 지금은 캔디크러쉬 몇천탄을 다 깼다. 스도쿠나 퀴즈같은 것도 좋아하고, 더 지니어스에 나오는 머리 굴리는 게임도 금방 금방 알아맞힌다.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도 이러니, 젊었을 땐 더 똑똑하고 영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것이 엄마의 한으로 남았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더 할 수 있었는데, 어린 동생 세명을 둔 장녀였던 엄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동생들, 특히 바로 아래 동생인 집의 유일한 남동생을 위해 양보해야 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전교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았던 엄마를 상고에 보냈다. 엄마의 학창 시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엄마는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보다도 어린 나이에 아빠와 결혼을 했다.


나는 가끔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쁘고 똑똑했던 엄마가, 그 동네에서 누구보다 잘 될 수 있었던 엄마가 대학은 물론이고 고등학교마저 원하는 곳으로 가지 못했다는 것이. 지금의 외할아버지는 인자하고 왜소해 보이지만, 엄마가 어렸을 무렵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래로 줄줄이 따라오는 동생들이 많은데 큰 장녀에게 투자하는 건 무리였을 테다. 갓 상고를 졸업한 엄마의 시야는 그다지 넓지 않았고, 어쩌다 만난 아빠와 평생을 같이 살게 되었다. 그 시절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리고 소설 속 수많은 주변인처럼, 엄마는 꿈을 접고, 상상과는 다른 현재를 산다.


그래서 나의 대학 합격 소식은 엄마와 외할아버지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딸은 엄마의 못다 이룬 꿈이라고 했나. 엄마는 소식을 듣자마자 외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했고, 외할아버지는 울면서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했다고 한다. 절대 그런 말 할 분이 아닌데. 엄마의 학창 시절은 엄마와 할아버지 모두에게 큰 아픔으로 남아있었다.


얼마 전 엄마는 나에게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사실 난 또 졸업반인 나에게 취업 얘기를 하는가 보다 했는데, 엄마는 오히려 내가 섣부르게 취업을 할까 봐 걱정하고 계셨다. 당신이 보기엔 넌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괜히 가정형편이나 가족 때문에 취업을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엄마는 내가 가족을 생각하다 꿈을 접을까 봐 너무나 미안해했다. 자신의 과거처럼 나 역시 똑같은 길을 되풀이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다지 좋지 않은 형편의 장녀로 자란 나는, 어린 시절의 엄마와 비슷한 점이 많다. 내 멋대로 하고 싶은 걸 하기에는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엄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 보다. 내가 자발적으로 내 꿈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나 가족이 압박을 줘서가 아니라, 그저 항상 부담을 갖고 살아온 나에게 꿈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치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는 것을.


꿈이다 뭐다 말할 정도로 확실한 진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엄마에게 확신을 줄만큼 내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비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는 엄마를 정말 사랑하지만, 엄마처럼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엄마의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는 엄마를 정말 사랑하지만,
엄마처럼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스물일곱



요즘 나는 절대 퇴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직장 생활을 욕하면서도 ‘걸쳐있는’ 이 상태에 내심 만족하기 때문이다. '나 퇴사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직장인이 뽑을 수 있는 마지막 칼자루다. 가슴 한편에 그 칼을 품고 사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퇴사'라는 단어는 내게 쓸모를 다했다. 용기 내지 못하고 안주하는 것을 비관하면서도, 적당하게 '걸쳐'있다는 소속감을 내심 뿌듯이 여긴다. 시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적절한 핑계, 실패에 대한 안전장치를 쉽게 뿌리칠 수 없다. 믿는 구석이 있는 상태로 현재를 비관하는 위선적인 경계에 서있는 나는 소비를 노동으로 돌려 막는 것을 워라밸로 착각한 채 산다. 어쩌면 평생 이렇게 안 맞는 소속감과 적당한 취미 사이를 방황하게 되지 않을까? 내 삶에도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나는 내심 앞이 잘 안 보이는 내 미래를 좋아했다. 뽀얗게 안개에 쌓인 내 미래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갈래길들이 있을 거라고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고 나니 고작 한두 개의 갈림길만이 보인다. 예상가능한 미래는 나를 언제나 두렵게 만든다.


이십 대 막바지의 어느 순간,
나는 모험심이 졸아들어 버린 지
오래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자신이 성숙하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다.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점점 무탈한 선택지를 고르는 일일까? 문학 같은 인생의 결말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흔한 삶은 언제나 내겐 가장 큰 두려움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삶에 샛길을 내려고 한다. 우주의 운행을 바꾸진 못할 작은 날갯짓이겠지만.






지금까지의 내 삶을 3부작 영화에 비유한다면, 1부는 <레이디 버드>의 시얼샤 로넌(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실망하고 기뻐하며 혼란스러운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고생)이고, 2부는 <프란시스 하>의 그레타 거윅(무엇이든 되고 싶지만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았던 대학시절의 나), 3부는 <걸스>의 레나 던햄(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던 직장인 시절의 나)이다. 높은 꿈을 가진 자의식 넘치는 10대 '관종'에서, 재능 있는 세상의 많은 사람을 마주하며 현실에 타협하고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20대의 여성의 보통날을 그려낸 트릴로지. 그녀들의 고민은 모두 나의 것이었다.


나와 꼭 닮은 이야기,  <레이디 버드>, <프란시스 하>, <걸스>


이 여성들의 고민은 진로가 정해졌다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안정적인 곳에 취업했지만 인생에서 가장 큰 진로 고민을 하는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특히 여성들의 고민이 더 커질 때는 결혼이라는 선택지가 나타날 때다. 이십 대 후반 여성의 정체성 고민은 이십 대 후반 남자의 고민과는 매우 다른데, 남자에게 결혼은 '내조의 시작'이자 더 나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지만 여성에게는 경력 단절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의 각 시기마다 여성의 고민과 정체성을 담은 작품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 내 나이처럼 이십 대 후반 여성을 다룬 영화가 많아진다면 더 좋겠다. 여성의 자아는 남성의 자아 못지않게 복잡하고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과 모성애를 제외한 여성의 삶을 그린 텍스트는 많지 않다. <섹스 앤 더 시티>나 <미스 슬로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성공한 직장 여성을 보는 건 즐겁지만 그런 모습만이 정답인 양 다루는 것도 능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성공한 직장 여성 텍스트 자체도 엄청 적다.



세상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다. 일의 성공이 최우선인 골드미스도, 속세의 성공과는 거리가 먼 비혼주의자도, 삶에 지친 워킹맘도. 그들의 삶 모두가 이야기가 되기를.





내 삼부작은 막을 내렸다. 이제 새로운 극이 올라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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