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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May 27. 2019

완벽한 세상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걸 찾아 헤매는 것 자체가 삶을 버티게 한다.

인간의 삶이란 우주에게는
굴 한 마리의 삶보다도 중요하지 않다.

- 데이비드 흄


가끔 삶이 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살아가는 게 발버둥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럼에도 삶이 힘들다고 얘기하는 것이 대화 소재의 팔 할 이상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소리만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이젠 버겁다. 힘들지 않은 회사를 다니거나, 아니면 힘든 삶을 바꿔보려고 노력하거나. 나는 내 대화의 선택지를 넓히고 싶다. 고작 회사 따위가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도록 작게라도 발버둥 치고 싶다.


이런 생각이 오만이라는 것도 안다. 괴로운 삶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물리적 피로와 정신적인 붕괴를 안 겪어본 것이 아니기에. 나도 회사 욕만 하던 때가 있었기에. 그럼에도, 그럼에도. 비판적으로 살더라도 염세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이라 느낄지라도, 눈만 가리는 미봉책이라도 뭐라도 하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염세는 정말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가끔은 누구나 그럴듯한 염세주의를 갈망한다. 특히 삶이 조금 힘겹다 싶을 때, 삶이 엉망일 때, 삶은 누구에게나 추하다고 생각하면 소름 끼치도록 냉정하게 위안이 된다.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한다고 했던 쇼펜하우어는 "극도로 비참한 상태에 놓이지 않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삶이 끝없는 연속이라는 우울한 사실을 인정하면 이에 대해 웃으며 말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한 해방감이 생긴다.

- 대니얼 클라인, <사는데 정답이 어딨어>


이런 염세주의의 역설과 유머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실제로 나의 유머는 대부분 이런 식이고), 세상에 대한 우울한 인식에서 그칠 뿐인 염세는 거절이다. 대니얼 클라인의 말처럼 철학적 염세주의는 단순히 삶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진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반박이다. 더 완벽한 세상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걸 찾아 헤매는 것 자체가 삶을 버티게 한다.






Epilogue



나는 이 이야기를 지금 끝내야만 했다.


공채형 인간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이제 끝났다. 취업을 준비하고 직장을 다니고 일과 삶, 사람에 대해 고민했던 지난 5년간의 시간은 퇴사와 함께 끝이 났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할 때였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다른 인간으로 나를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 끝에 적어본 것들은 아래와 같았다.


삶의 불확실성을 추구합니다.
즐겁게 일하고 잘 늙고 싶습니다.
글 쓰고 사유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기약 없는 여행을 말이다. 영화 〈와일드〉 속 셰릴 스트레이드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을 짊어지고 여행을 떠난다. 평론가 김혜리는 이 영화를 보고 이런 평을 남겼다.


짊어질 수 있는 부피를 넘어선 물건은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소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게 예기치 못한 위안을 주었다.

 

나도 삶의 모든 것을 캐리어 하나에 담아 떠나려 한다. 내가 짊어질 수 있는 부피를 넘어선 모든 것들, 이를테면 이전의 삶, 감정, 강박, 죄책감, 부담감을 모두 버리고 나는 잭 케루악처럼 여행하고 버지니아 울프처럼 글을 쓸 것이다. 낯선 이름의 도시들은 모두 나의 방이 될 것이다. 그 방은 아늑하지만 낯설고, 불연속적이지만 영구적이고, 조용하지만 항상 선율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예상할 수 없는 것들 속에서 나는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의 삶을 살아갈 나를.


설렌다. 이제 내 손을 떠날 책의 에필로그를 쓰며 드는 생각이다. 책을 만든다는 것도 설레지만, 드디어 이 책을 끝낸다는 점이 가장 설렌다. 이제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꼭 끝내야만 했다. 이걸 끝내지 않고는 이후의 삶을 이야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정리하고, 털어낸 후에야 나는 후련하게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쓸 것이다







Epilogue of epilogue



《공채형 인간》의 마지막 문장을 적은 지 1년이 흘렀습니다. 작년 8월 독립출판물로 처음 세상에 나왔던 《공채형 인간》은 좋은 기회로 올초 출판사에서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12주간 브런치 위클리 연재를 시작하며 더 많은 독자분들과 만날 수 있었지요.


저는 그간 전혀 다른 이야기를 썼습니다. 퇴사 후, 미얀마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라 9개월간 조용한 여행자가 되었습니다. 여행이라기보단, 낯선 곳에 자기만의 방을 갖기 위한 시간에 가까웠습니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소아는 그의 책 《불안의 서》에서 말했습니다. 


“오직 밤에만, 밤에는 나는 나 자신이며, 다른 모든 사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잊힌 존재로, 버려진 존재로 있을 수 있다. 현실과 아무런 연관도 맺지 않은 채, 그 어떤 세상의 소용과도 무관한 채, 나는 오롯이 나로 있는 나를 발견하며, 위로를 얻는다”


그간 저는 페소아가 말한 나만의 밤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막연히 여행이 끝나면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상상했는데, 예상 밖에도 저는 더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퇴사한 것이 아주 옛날 일 같습니다. 퇴사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브런치에 퇴사 이야기를 계속 올리는 게 조금 민망하기도 하더라고요. 사실 책 《공채형 인간》은 회사에 대한 이야기보다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위클리 매거진 연재에서는 12화로 압축하다 보니 주로 입사와 퇴사 사이의 기록을 담게 되었습니다.


회사 밖에서의 사과집이 궁금하신 분들은 근처 서점에 가서 《공채형 인간》을 후루룩 훑어보셔도 충분하겠습니다. 퇴사 이후의 저의 글과 삶이 궁금하신 분들은, 브런치를 통해 계속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고요! (공채형 인간 매거진만 구독하신 분들은, 이번 기회로 저와 함께 하시는 건 어떨까요?)


가끔 《공채형 인간》을 읽을 때면, 부끄럽습니다. '아니 이런 걸 책으로 냈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첫 책이 나온 이후에도 꾸준히 쓰고, 지나가는 지렁이만 알아차릴 정도라도 조금씩 성장했기에 아쉬운 점이 보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 달 전에 쓴 것도, 어제 쓴 것도 부끄러운걸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질보다 양으로 승부합니다.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 씁니다. 부끄러움을 느낄 새 없이, 새 글을 쓰는 재미, 가끔은 허세(하 진짜 이번 건 재밌다 끝장난다)로 씁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쓰면 나를 괴롭히는 악마들의 목소리가 떠나갑니다. 부끄러움은 나를 쓰게 하고, 부끄러움은 나를 행동하게 하니, 어쩌면 평생 부끄럽게 살고 싶습니다. 이것은 저의 생체 시스템 같은 걸까요? 수치와 염치에 민감한 것은 저의 장점입니다.


글도 부끄럽지만 삶도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움을 동력 삼아 소외된 것들의 동료가 되어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사소한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겠다는, 저의 필명처럼요.


다짐으로 끝내는 글을 싫어합니다. 다짐한 자신에 취해 행동하지 않고 넘어간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그런데 이렇게 또 다짐을 했으니 부끄럽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써야겠습니다.


말이 길었습니다.

그간 《공채형 인간》과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과집 드림




사과집 ⎮ 한때 〈공채형 인간〉이었으나 퇴사 후 〈방을 나가지 않는 여행자〉가 되었다. 주변의 〈마이너리티〉에 관심이 많으며 〈그 많던 여직원들은 어디로 갔는지〉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캐리어 속 우쿨렐레〉를 넣고 떠나 스페인에 머물며 종종 〈트램타고 건축기행〉을 한다. 책 만들기의 매력에 빠져 사람들에게 〈독립출판의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다. 사과집은 ‘사소한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기’의 준말.


모든 이야기는 브런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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