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한 봉지

by 하이민

나는 요리가 싫어요

그 정성과 그 시간과 그러한 과정에

칼자국이 난 도마에 자꾸만 빨간 국물이 베이는 게 보기 싫어서

아마도 나는 아직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준비가 되지 않았나 봐요


컵라면은 물만 부으면 끝인데

같은 라면인데 봉지에 든 면은 왜 이리 먹기가 귀찮을까요

끓이지 않은 라면 봉지를 들춰내면

말랑해질 기회를 잃은 건더기와

쩌들어버린 스프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죠


자신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둘 데 없는 재료란 참 어정떠요

전부 다 입안으로 털어 넣을 수만 있으면 소화되어 말끔히 사라질 텐데

건더기는 너무 딱딱하고 스프는 너무 짜서

입천장에 넣지 못해 선반 구석에 들어붙어선

찐득찐득 녹아내려 떨어지질 않아요


나는 다 먹어버리고 싶은데

라면을 끓이려 했던 게 잘못이었을까요

잔반조차 되지 못해 선반에 붙어버린 빨갛고 검은 점들이

부서지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바닥처럼 눌어선 누워만 있어요

keyword
이전 17화잉크 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