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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Jun 07. 2021

하얀 밤도 밤이다

하얗고 밝은 밤을 본 적이 있다. 딱 10년 전 이맘때의 일이다. 핀란드에서 교환학생 학기가 끝난 뒤 유럽 여행을 떠났던 나는 여행 후 다시 헬싱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출발하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함이었다. 핀란드에서 여름밤을 보낸 것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떠나는 내게 마지막 선물이라도 주려는 듯 때마침 백야가 시작되었다. 

    

백야 현상은 고위도 지방에서 여름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현상이다. 해가 지지 않기 때문에 밤이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는데 영어로는 White night라고 한다. 친구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밤 11시쯤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정말 아침 11시라고 해도 믿을법한 하늘이었다. White night라는 이름을 누가 붙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하얀 밤이었다. 밝고 환한 밤, 그리고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밤. 그런데 문득 백야는 해가 지지 않은 것이니 밤이 아니라 낮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겨울철에 밤이 계속되는 극야 현상도 있는데 이때는 해가 뜨지 않으니 밤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백야나 극야는 일시적인 변화일 뿐이지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얗고 밝아도 밤은 밤이고, 검고 어두워도 낮은 낮이다. 문득 얼마 전 들었던 한 강연이 떠올랐다. 14살 나이에 자고 일어나 보니 갑자기 시각을 잃었다는 허우령님의 이야기였다. 시각장애를 얻은 뒤 만난 한 친구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우령인 우령이잖아.”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나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시련을 마주할 때면 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어떤 시련이든 결국은 지나가는 것이었고 변하지 않는 것은 내 자신이었다. 앞으로는 삶에서 나를 스쳐 가는 시련을 만나도 나는 나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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