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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외맛식혜 Jun 14. 2023

크리스마스에 해야 할 것 세 가지

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하는 'Co-habiting'

여름의 끝자락, 해가 점점 짧아지고 점차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영국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 


영국에 살다 보면 사람들이 기념하는 중요한 순간들을 거리만 걸어보아도 알 수 있다. 봄이 다가오면 수많은 달걀 장식과 함께 부활절을 기념하고, 왕족 일가에 중요한 날이 있으면 영국 국기와 왕관 무늬가 거리를 뒤덮으며, 여름에는 길어진 해와 함께 다양한 축제가 열린다. 그리고 가을의 가장 큰 행사인 핼러윈이 끝나는 기점으로 영국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준비에 바빠진다.  


영국 내에서 가장 큰 명절이라고 하면 단연 크리스마스라고 할 수 있다. 여타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전통이 강한 영국에는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를 아주 오래전부터 기념해 왔고, 근래에 들어서는 종교적인 성격보다는, 추운 겨울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 날로 기억되는 듯하다. 우리로 따지면 추석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까?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 때까지 애인을 만들어야 된다던가, 눈 내리는 풍경과 더불어 로맨틱한 하루를 꿈꾸는 성격이 강하다면, 영국에서는 다양한 음식을 준비해 배 터지게 먹고 오랜만에 가족 모두와 만나 안부를 전하는 다분 가족적인 날이다. 물론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으며, 특히 크리스마스 전후를 기점으로는 문을 여는 곳도 거의 없다. 그렇기에 갈 곳 없는 유학생이라면 미리 먹을 음식을 잔뜩 사야 한다는 소문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다.


11월부터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장장 2개월을 기념하는 만큼 영국 곳곳에서는 참으로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 마켓은 아마 영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축제가 아닐까 싶다. 내가 사는 맨체스터에는 익스체인지 스퀘어 (Exchange Square)라고 하는 작은 광장이 존재하는데, 작년에 처음 크리스마스를 보낸 나는 그 작은 공간에도 꽉꽉 들어찬 다양한 마켓들과 그곳을 해가 진 늦은 시간까지 메운 사람들에 놀라곤 했다. 그 광장뿐만 아니라 메인 거리라고 할 수 있는 마켓 스트리트 (Market Street)와 피카딜리 공원 (Piccadilly Gardens)에도 다양한 공예, 디저트, 기념품, 주점, 그리고 식당들이 들어선다. 


맨체스터를 상징하는 꿀벌이 역시나 빠질 수 없다.


런던이나 독일 도시들만큼 유명하고 큰 규모는 아니지만 막상 출퇴근하느라 지쳐 둘러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런던에서 친구가 맨체스터에 놀러 오게 되자 그 기회를 삼아 함께 둘러보았다. 대단한 것이 있는 건 아니지만, 바람 쌩쌩 불고 추운 날씨에도 밖에서 맥주를 마시고 감자튀김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덩달아 신이 났다. 한 가지 재밌는 건, 마켓 부스 중 한국식 핫도그 (소시지에 빵 반죽을 묻혀 튀긴 음식) 전문점이 있었는데 인기가 남달랐다는 것이다. 그게 한국식 인지도 몰랐던 나는 괜스레 뿌듯해졌다. 


크리스마스 마켓에 다녀왔다면 그다음은? 애인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은 바로 ‘크리스마스 영화 보기’이다. 크리스마스에 관련된 영화라고 하면 우리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케빈의 <나 홀로 집에>, 사랑 고백이 인상적인 <러브 액츄얼리>, 초록 괴물이 인상적인 <그린지> 정도 일 것이다. 내가 애인을 만나고 첫 크리스마스를 보냈을 때 그는 "봐야 할 크리스마스 영화가 너무 많아 고민이다"라고 했고,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크리스마스 영화가 그것 말고 또 있어?’ 그렇다. 크리스마스는 하나의 장르이다. 


매년 11월이 되면 특히 영국과 미국 방송사, 영화제작사, 그리고 OTT 플랫폼들에서 크리스마스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2022년 한 해에만 라이프타임(Lifetime), 넷플릭스(Netflix), HBO 등에서 공개한 신작 영화가 총 172편이라고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나다. 우리가 떠올리는 영화들은 큰 제작사가 투자해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고 명성 있는 감독에 의해 제작된 것들이지만, 실상 작은 규모에 매년 비슷한 내용으로 제작되는 크리스마스 영화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 번째, 현재 삶에 문제가 있는 주인공은 때마침 크리스마스에 부모님을 뵈러 집에 간다 - 이때 집은 시골 작은 마을에 있으며 눈이 펑펑 와서 경관이 매우 예뻐야 함. 둘째, 그 작은 마을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이상하게 엮이는 일이 생긴다. 셋째, 주변 사람들이 끼어들어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 놓고 '어라'하는 사이에 서로의 마음이 가까워진다. 마지막으로, 마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해 최고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그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읽다 보니 혹시나 드는 생각이 없는지. 맞다, 우리네 아침드라마와 다를 것이 없다. 자본력이 느껴지는 상업 영화나 긴 여운을 남기는 독립 영화 말고, 이번에는 뻔하면서도 정감 가는 크리스마스 영화에도 도전해 보면 어떨까?  


이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으니, 그건 바로 크리스마스 전통 음식. 12월이 되면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고조되는데, 이때 아드벤트 켈린더(Advent Calender)가 그 기대에 부흥한다. 액자 같은 상자에 날짜가 하나씩 적혀 있는데, 12월 1일을 기점으로 오늘 날짜가 적힌 칸을 열면 그 안에 든 초콜릿을 먹을 수 있다. 다양한 초콜릿 브랜드가 있는 만큼 밀크 초콜릿, 과일 맛, 비건 등등 수많은 종류 중 본인이 좋아하는 맛을 고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남녀노소 모두 즐기는 활동이며, 초콜릿을 안 좋아한다면 맥주나 티처럼 다른 선택지도 있다. 심지어 스와로브스키에서는 자사 주얼리로 채운 아드벤트 켈린더를 두려 630파운드 (한화 100만 원)에 판매한다. 

출처: 스와로브스키 홈페이지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음식 얘기를 해보자.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면 온 가족이 큰 식탁에 둘러앉아 크리스마스 디너 (Christmas Dinner)를 즐긴다. 디너라고 해서 꼭 저녁은 아니며 보통 점심이나 이른 오후에 시작된다. ‘설날에는 떡국’처럼 한 가지 음식으로 대표되기보단, 뷔페처럼 여러 종류를 준비하고 각자 취향에 맞게 덜어 먹는 방식이다. 다만 어떤 음식인지는 보통 정해져 있다. 베이컨과 소시지, 칠면조 등이 단백질을 담당하며 피그 인 블랭킷 (Pigs in blacket)이라고 베이컨을 소시지에 돌돌 말아 구운 요리도 있다. 채소로는 구운 감자, 당근, 파스닙(Parsnip), 방울 양배추(Brussel), 스위드(Swede)가 들어가며 크랜베리 소스와 그레이비소스를 그 위에 뿌리면 마무리된다. 


당연히 각 지역마다 각 집마다 준비하는 요리는 조금씩 달라지는데, 작년 크리리스마스를 애인의 가족과 함께 보낸 나는 처음으로 영국식 크리스마스 디너를 맛볼 수 있었다. 요크서 지방인만큼 동그랗게 튀긴 빵인 요크셔푸딩(Yorkshire Pudding)도 있었고, 만두소 같은 것을 동그랗게 말아 튀긴 스터핑(Stuffing), 그리고 그라탱의 종류인 감자 도피누와(Dauphinoise)와 컬리플라워 치즈(Cauliflower Cheese)까지. 근사하고 든든한 한 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의 명절 음식처럼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는 양은 절대 아니며,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나서도 두고두고 먹게 되는데 이때쯤 되면 다들 그 음식에 질린다고. 영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그 밖에도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복싱데이 (Boxing Day) 역시 휴일이며 간단한 티와 함께 다양한 디저트를 맛본다. 그중 트라이플(Trifle)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데, 스펀지 케이트를 바닥에 깔고 커스터드와 딸기 등 과일을 층층이 쌓아 올린 뒤 가장 꼭대기에는 크림을 듬뿍 올린 디저트이다. 흡사 모양은 티라미수와 매우 닳아 있는데 크림과 과일이 어우러져 굉장히 달달하고 부드러운 식감을 자아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침을 꼴깍 삼킬 정도로. 


영국에서 첫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깨달았다. 왜 그토록 이 날이 기다려지는지. 해도 짧고 혹독하게 추운 겨울 가족들과 모여 시내 마켓을 돌며 정취를 느끼고, 신파조의 영화도 잔뜩보고, 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특별한 음식을 배 터지게 먹는 이 나날들이 특별할 수밖에. 해외에 나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느끼기가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는 예상치 못한 따스함을 안겨주었다. 올해 끝자락에도 한해를 열심히 견뎌낸 나에게 크리스마스가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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