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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외맛식혜 Jul 25. 2023

식사 아니고, 한잔 하는 거 아니고, 펍에 가는 이야기

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 하는 'Co-habiting'

‘영국’하면 사람들 머릿속에 흔히 떠오르는 키워드들이 있다. 빅벤, 빨간 이층 버스(는 런던에만 있다), 열광적인 축구팬들, 피시 앤 칩스, 그리고 펍.


펍(Pub) 그리고 맥주는 영국 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주말에 친구들이랑 펍에 가고, 낮에 시간이 애매하면 펍에 가고, 새로운 도시에 여행 가면 펍에 가고, 친구 생일이면 펍에 간다. 참, 회사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펍에 간다. 이처럼 펍은 휴식의 장소이자 만남의 장소이며, 다양한 사람들이 섞이고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쉬는 날 없이 영업하며 낮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멈추지 않는다. 슈퍼마켓보다도 영업시간이 길다고 하면 믿어지는지? 일요일 5시면 슈퍼마켓은 닫지만 펍은 사람들로 붐빈다.


처음 한국에서 왔을 때 "펍에 가자"라는 말을 듣고 한국에서 "한잔하러 가자"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보통 한국 같으면 음식이 나오는 술집에 가서 여러 가지 안주를 시켜서 나눠먹고, 소주와 맥주를 시켜 각자 취향대로 마신 후, 말 그대로 ‘한 잔’에 끝나지 않고 2차, 3차로 다른 술집을 전전할 것이다. 어느 날 회사 동료들을 따라 펍에 간 나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펍 경험에 다소 놀라게 되었다.  


우선 나는 8시에 일 끝나고 저녁을 먹지 못해 상당히 배고픈 상태에서 펍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아무도 음식을 시키지 않고 다들 맥주만 손에 든 채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눴다. 알고 보니 일이 먼저 끝난 대부분의 동료들은 이미 집에 가서 씻고, 옷도 갈아입고, 저녁도 먹고 왔단다. 정말 술만 마시러 나온 것이다. 그날 가방에 숨겨둔 시리얼바가 있었던 게 참 다행이었다. (여기 1년이 지나면서 보고 느낀 것이지만, 한국처럼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려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경우가 흔치 않다. 서로 시간이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다음으로 미루고 쿨하게 갈 길 가는 이들이다.) 


그 뒤로도 몇 번 6시나 7시처럼 우리로 따지면 분명 저녁 시간인 애매한 시간에 펍에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즉 영국에서는 펍에 가자는 건, 식사까지 같이 하자는 건 아닌 것이다. 미리 알아서 해결하거나 펍에서 간단한 피자를 시켜 혼자 먹거나. 궁금증을 참지 못해 나중에 애인에게 물어봤다. “여기 사람들은 친구끼리 같이 식당 안 가?”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 “가긴 하는데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건 진짜 특별한 날이나 데이트에서 보통 하지." 친구끼리 밥 먹을 때는 맥도널드에 가거나 슈퍼마켓에서 간단한 샌드위치를 사 먹는 이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보다 검소한 영국 사람들의 면모에 감탄하곤 한다. 


펍에 들어가면 일반적으로 조금 어둑한 분위기에 음악이 다소 시끄럽게 나오며, 한쪽 벽면에 스태프들이 다양한 드래프트 맥주를 따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포츠 펍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펍) 같이 큰 규모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테이블이 3-4개 정도로 작으며 자리가 없으면 바에 서서 마시거나, 벽에 기대서 마시는 경우도 대부분이다. 한국처럼 벨을 누르고 "여기 소주 2병 주세요"는 없다. 영국 레스토랑이 철저하게 테이블 서비스인 것에 비해 펍은 철저히 셀프서비스이다. 


펍은 보통 맥주를 주로 판매하는데, 지금까지 펍에 갈 때마다 새로운 맥주를 적어도 한 가지는 만날 수 있었다. 한국 편의점에서 해외 맥주로 자주 보이는 기네스, 하이네켄, 스텔라 등등은 사실 거의 보지 못했다. 영국만 해도 로컬 브루어리가 엄청나게 다양하며 각 펍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로컬 브랜드 혹은 신기한 유럽 맥주들을 선보인다. 청량하고 깔끔한 맛의 라거(Larger)가 주를 이루는 한국과 달리 페일 에일(Pale Ale), 인디언 페일 에일(IPA), 그리고 스타우(Staut) 등 다채로운 종류가 고루 준비되어 있고 알코올 도수나 테이스트 노트 등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새로운 펍에 갔다면 처음 보는 맥주 중에 골라야 하기 때문에 주문이 항상 망설여지는데, 그때를 위한 나만의 비법이 있다. 우선 큰 카테고리 ‘라거’, ‘IPA’, ‘흑맥주’ 중 끌리는 것을 마음으로 정하고, 직원에게 말한다. “IPA 중에 추천해 주세요.” 가장 많이 나가는 것을 얘기해 줄 때도 있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골라줄 때도 있다. 운 좋으면 주문 전 미리 맛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직원에게 물어보면 실패가 없다는 것. 


이렇게 맥주를 정했으면 그다음은 사이즈. 보통 하프 파인트(Half Paint)와 파인트(Paint)로 나뉘는데, 우리로 따지면 250ml과 500ml 정도로 볼 수 있다. 당연히 파인트로 시키는 게 가성비가 좋으며 생각보다 파인트도 금방 마시기 때문에 안 마실 거 아니면 파인트가 여러모로 낫다. 특히 영국에서는 아무도 잔이 안 비었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지만) 남들이 세 잔 네 잔 마실 때 파인트 한 잔으로 꾸준하게 달려도 된다. 영국 사람들을 술 마시는 것을 굉장히 즐기지만 막상 술자리에서는 취하거나 술이 주된 목적이 아닌, 대화와 친목도모가 항상 우선이 된다. 대화하다 보면 술을 빨리 마시기도 어렵고 혼자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본인이 적정선에 도달했다면 그만 마셔도 되고 펍마다 보통 논 알코올 맥주도 구비되어 있어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선택하면 된다. 다만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영국에서 만난 사람 중에 술 안 마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문화가 이렇게 무섭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이야기, 어머니와 옥스퍼드를 갔을 때 이야기이다.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펍 중 하나인 화이트 홀스(White Horse)에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티모시(Timorthy) 맥주를 시켰는데, 내 잔을 한 모금 마신 어머니가 말했다. “영국은 맥주가 시원하지 않더라.” 그 말을 듣고 나도 날름 마셨는데 정말이었다. 한국에서는 잔까지 냉동해서 차갑게 서빙하는데 비해, 이 맥주는 미지근하지 않다 뿐이지 정말 약간의 시원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궁금함을 참지 못한 우리는 그 이유를 검색했는데, 냉장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에는 맥주를 상온에 보관했으며, 특히 라거보다 역사가 깊은 에일일수록 그 전통을 기리기 위해 상온보다 약간 더 찬 온도에서 서빙한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혹시 영국의 펍 문화를 역사적으로 경험하고 싶다면 미지근한 에일을 마셔보시라. 처음에는 나도 별로였지만 마시다 보니 에일의 묵직한 맛과 미지근한 온도가 생각보다 잘 어우러졌다. 


영국은 지금 한참 해가 길고 날씨가 좋은 여름을 맞이했다. 부활절 이후 부쩍 따뜻해진 날씨는 5월 말에 들어 완연한 여름이 되었는데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는 사람들은 이미 반팔 반바지, 나시를 입거나 심지어 상의 탈의를 한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나는? 물론 긴바지 긴팔이다. 22도 밖에 안 되는 날씨에 바람이라도 불면 춥기 때문이다.


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사람들은 대낮부터 다들 펍으로 몰려간다. 보통 12시에 여는 펍들은 5시 6시면 금세 자리가 다 차며 햇빛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야외 자리가 들썩인다. (그래서 펍 안은 조용한데 테라스만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한국인인 나는 실내가 좋은데 야외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도 많다.) 나도 얼마 전 이 틈을 타 애인과 대낮에 펍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브루어리가 직접 운영하는 로컬 펍으로 본인들이 만든 맥주만 자랑스럽게 놓여있었다. 망고와 파인애플 맛이 나는 진노랑 색의 에일을 시켜 테라스에 남은 마지막 자리에 앉았다. 때마침 햇빛도 좋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 맥주가 참 맛있었다. 영국 오기 전까지만 해도 ‘금주’ 선언을 하며 술자리에서 항상 콜라만 마셨는데. 여기에 오니 펍에서 파인트 한 잔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이제 조금씩 이해하고 있는 걸까. 영국에 산다는 건, 좋은 날씨에 기꺼이 나와 펍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지금을 즐기는 것.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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